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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복군아리랑
    후렴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요 광복군 아라랑 불러나보세 이조왕 말년에 왜 난리 나서 이천만 동포들 살길이 없네 일어나 싸우자 총칼을 메고 일제 놈 처부셔 조국을 찾자 내고향 산천아 너 잘 있거라 이네 몸 독립군을 따라가노라 부모님 처자를 리별하고서 왜놈을 짓부셔 승리한 후에 태극기 휘날려 만세 만만세 승전고 울리며 돌아오리라 우리네 부모가 날 찾으시던 광복군 갔다고 말 전해 주소 광풍이 불어요 광풍이 불어요 삼천만 가심에 광풍이 불어요 바다에 두둥실 떠오는 배는 광복군 싣고서 오시는 배래요 동실령고개1)서 북소리 둥둥나더니 한양성 복판에 태극기 펄펄 날려요 밀양아리랑 곡조이다. 광복군 '제3지대가'를 작사한 장호강 장군의 증언에 의하면 1940년 광복군 성립과 동시에 본토 상륙작전을 준비하며 군가로 부른 것 이라고 한다. 현재 이 노래는 중국 동포사회와 충남 예산, 경남 밀양 지역 등에서 전승되고있다. 위의 노랫말은 박창묵교수의 논문〈중국 조선족과 아리랑〉 ('99 한민족아리랑연합회 학술세미나 자료집〉에서 보완, 정리한 것이다. 자료출처 : 겨레의 노래 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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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9-06
  • 풍류를 즐기며 살아온 우리 민족
    故 최종민교수 (철학박사, 국립극장예술진흥회 회장, 동국대문화예술대학원 교수) 풍류(風流)의 전통 국악을 아는 사람들 간에는 “풍류를 한다.”고 하면 영산회상을 연주하며 노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거문고를 비롯해서 대금․해금․세피리․단소․양금․가야금․장구 등으로 편성되는 악기를 가지고 상영산부터 중영산․세령산․가락덜이․상현도드리․하현도드리․염불도드리․타령․군악까지 한 바탕 연주하는 것을 줄풍류라하고 그런 음악하는 것을 ‘풍류한다’고 일러 왔기 때문이다. 물론 지방에 따라서 연주하는 곡목이 추가되기도 하고 가락이나 분장법이 다르긴 하다.남도지방에서 연주되는 향제 줄풍류에는 밑도드리가 중간에 들어가고 뒷풍류라고 하는 계면가락도드리․양청도드리․우조가락도드리와 굿거리가 들어가서 규모도 커지고 더 흥겹게 연주한다. 풍류를 하며 노는 모임에서는 시조나 가곡을 부르기도 하고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춤을 출 수도 있다. 그런데 춤을 출 때에는 반주하는 음악이 줄풍류가 아니고 삼현육각 편성의 대풍류를 연주하게 된다. 그래서 오늘날 전승되는 풍류의 음악에는 현악영산회상(重光之曲)을 거문고 중심의 세악편성으로 연주하는 줄풍류와 관악영산회상(表正萬方之曲)을 삼현육각 편성으로 연주하는 대풍류가 있다. 또 시조나 가곡도 역시 풍류의 중요한 레퍼토리이다. 풍류의 근원을 따져 올라가면 그 근거는 최치원(崔致遠)이 쓴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에 다다른다. 최치원은 國有玄妙之道하니 曰風流라고 하면서 풍류라는 현묘한 도를 儒․佛․道 三敎의 내용으로 설명하고 있다. 최치원이 파악한 삼교의 내용이란 유교는 충성과 효도를 실천하며 接化群生하는 가르침이요 불교는 악행을 막고 선행을 힘써 행하여 복 받도록 하는 가르침이며 도교는 無爲에 處하여 不言을 가르치는 道라는 것이다. 그 런데 이러한 三敎의 내용이 풍류라는 현묘한 도에 들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나라에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현묘한 도가 있는데 그것의 명칭이 풍류라는 것이다. 풍류의 정의나 내용은 三敎(儒․불․道)의 핵심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런 풍류를 행하던 무리가 바로 풍월도(風月徒) 또는 풍류도(風流徒)라 일컫던 화랑도였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난랑이라는 화랑이 죽어서 비문을 지으면서 최치원이 풍류의 근원에 대하여 설명을 하게 된 것이다. 화랑들이 지켰던 세속오계에 보면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유교적인 것이 있고 살생유택이라는 불교적인 것도 있다. 또 명산 대천을 찾아다니며 심신을 수련했다고 하는데 자연을 가까이 하며 천지의 기와 하나가 되고자 하는 것은 도교의 무위자연하며 양생하는 사상과 상통하는 것이다. 이런 것을 미루어 보면 풍류는 우리나라의 현묘한 道인데 이것을 실천하던 무리가 화랑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풍류는 하나의 사상으로서 또는 하나의 道로서 우리문화의 근원이 되는 무엇으로 자리매김 될 수 있는 것이다. 유동식도 한국사상 또는 한국종교의 근원을 풍류로 본 적이 있고 송항룡도 풍류는 최치원이 파악한 한국의 고유사상이라고 한 바 있다. 이러한 풍류가 후세에는 자연을 가까이 하고 음악을 즐기며 멋스럽게 사는 하나의 도로 전승되게 된다. 좋은 술을 빚어 놓고 친구들을 초대하여 한 판 풍류판을 벌인다고 하면 음악은 물론이요 시도 짓고 그림도 그리고 차도 마시고 술도 마시고 기생도 곁드리고 그래서 일상의 자기를 떠나 천인합일(天人合一)하는 망아(忘我)의 경지를 맛보는 것이다. 고려시대에 차(茶)와 고려청자 같은 것이 발달하고 조선시대에 정자(亭子)가 많이 지어지며 율각(律閣)이나 율계(律契)가 유행한 것도 다 풍류가 생활화 되면서 일어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풍류남아 하면 멋을 알고 돈을 잘 쓰고 예술도 아는 그런 남자를 연상하게 되어 있고 풍류객하면 풍류음악을 잘하는 음악애호가 쯤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풍류라는 말이 음악에 남아 전승되고 있기 때문에 풍류의 의미도 음악을 통해서 재조명해야 할 형편이다. 우리의 고유한 사상이 신라시대에는 화랑도 같은 제도를 낳았고 고려와 조선을 통하여서는 멋스런 생활을 발달시켰었는데 지금은 음악으로 전승되고 있다는 말이다. 금(琴)은 금야(禁也)라 금지사심야(禁之邪心也)라는 말이 있다. 거문고를 하는 것은 사특한 마음을 없애기 위함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내용인데 옛날 선비들이 남긴 거문고 악보에 자주 눈에 띄는 구절이다. 선비들이라고 하여 하루종일 계속 공부만 하는 것은 아니다. 잠시 쉴 때에는 거문고를 끌어 당겨 “슬기둥 뜰- ”하며 풍류음악을 한다는 것이다. 그냥 쉬면 사특한 마음이 일어나기 쉽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줄풍류의 음악들은 그런 정신이 발달시킨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음악을 하되 마음속에 일어나기 쉬운 욕심스러운 것을 다 덜어낼 수 있도록 음악에서도 덜어낼 수 있는 음은 다 덜어내고 기교가 아닌 마음으로 음악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하늘이 준 나의 가능성을 되찾을 수 있는 또 하나의 도를 음악을 통하여 실천해 보는 것이다. 이복기성(以復其性)이라던지 천인합일(天人合一)등의용어가 풍류음악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세상일에 잡착하여 악착같이 사는 사람은 풍류를 알 수 없게 되어있다. 그래서 그런지 삶에 찌든 현대인에게서는 풍류를 찾아보기 어렵다. 돈벌이에 여념이 없는 기업인이나 출세욕에 사로잡힌 관료들은 풍류와 거리가 멀어 보인다. 우리사회는 한 동안 그렇게 살아 왔다. 그런데 21세기를 바라보는 지금 우리는 삶의 질을 생각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다시 풍류스러운 생활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자동차로 온 가족이 교외로 나들이를 한다든지 보다 경치 좋은 곳에 별장을 짓는 것 등은 풍류의 정신이 나타나고 있는 한 모습으로 볼 수 있다. 일상적인 생활 틀에 박힌 일과를 벗어나서 자유와 자연과 새로운 생활체험을 모색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의 참모습을 생각해 보고 자기다운 삶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것이다. 우리 속에 잠재해 있던 풍류의 욕구가 서서히 다시 살아나고 있는 것인데 여기에 음악을 접목시켜야 참 풍류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고 더 멋스러운 생활전통을 회복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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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9-05
  • 영원한 자유인 최우칠
    최우칠은 텔레비전에 자주 나온다. 그러나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늘 주연이 아니라 조연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누가 소리를 하면 옆에서 장구나 북 치는 것이 최우칠이고 기악산조를 할 때에도 역시 옆에서 장구를 친다. 얼굴을 정면으로 화면에 비치는 일은 거의 없다. 늘 옆모습만 비친다. 그가 텔레비전에 나오기 시작한 것은 30년 전쯤 되니까 오랫동안 그렇게 방송을 타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KBS.TV의 국악한마당 프로에 주로 나오지만 과거에는 송해가 진행하는 전국노래자랑에서도 국악반주를 담당했었다. 그는 그런 활동을 하면서 전국 방방곡곡 안 가본데 없을 정도로 많은 곳을 다녔고 별별 재미있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만나봤다. 그런 일을 꼭 무슨 일이라고 생각하여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재미있고 즐거우니까 계속 그런 일을 생활로 알고 살아왔다. 수입이나 돈에 대한 생각도 고정된 것이 없다. 열심히 활동하면 얼마간의 돈이 생기고 생기는 돈은 감사히 생각하고 쓴다. 분수에 넘게 막 쓰지도 않지만 짠돌이처럼 먹을 것 안 먹고 쓸 것 안 쓰는 그런 타입은 아니다. 술을 좋아해 거의 매일 술을 마시지만 어울리는 사람들과 즐겁게 담소하며 술을 마신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누구와 술을 마셔도 재미있게 이야기를 하며 술을 마시고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셔도 술주정을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최우칠은 1952년생이다. 군산에서 꽤 넉넉히 사는 집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국악을 좋아해서 국악원에 놀러 가실 때는 늘 우칠을 데리고 다녔다. 아버지는 군산국악원 명예회장을 할 정도로 국악인들과 가까이 지냈고 무슨 행사라도 있게 되면 집에서는 국악인들이 함께 하는 잔치가 벌어지기 일쑤였다. 당시 서울에서 임춘앵이나 박보아씨 같은 국악인들이 여성국극단을 데리고 군산에 오면 우칠의 집에서 한 판 벌이는 때도 많았는데 그럴 때면 우칠의 아버지는 북을 치기도 하고 단가를 하기도 하며 놀았다. 그런 분위기에 그런 경험을 많이 하며 어린 시절을 보낸 최우칠도 그의 아버지처럼 북치고 단가하고 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게 몸에 배게 되었다. 그런데 언제인가 그의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우칠을 초등학교 5학년 때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보냈다. 그래서 어머니와 함께 사는 서울생활이 시작되었다. 우칠의 어머니 역시 국악을 좋아해서 유명한 고수였던 김득수와 오빠 동생 하는 의남매를 맺어 친하게 지냈다. 우칠은 미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용산중·고를 다녔는데 어머니가 군산으로 내려가게 되면 김득수선생 집에서 밥 먹고 다녔다. 김득수의 아들 은도와 늘 어울려 놀고 함께 자기도 하니까 자연 학교에 대한 관심보다는 국악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게 되었다. 그래서 당시 국악예술학교에 다니는 김덕수·김무경·이철주·김영재 등과 어울리게 되고 연상되는 서용석 등과도 술을 마시며 국악 전공자들과 함께하는 생활을 했다. 그런 모습을 본 김득수선생이 어차피 국악을 좋아하니까 제대로 국악을 배워봐라 하여 김득수선생에게 판소리를 배우고 북도 배우며 국악공부를 본격적으로 해 나갔다. 그런 생활을 하면서 국악에 푹 빠져 있었던 최우칠도 나이가 차서 군대에 가게 됐다. 군 생활에서는 운전병 노릇을 했는데 그 운전하는 기술이 제대 후 국악인들과 더 가까운 관계를 맺도록 해 주었다. 제대한 다음 조상현명창의 차를 운전하며 같이 다니게 되었다. 조상현이 MBC의 내 강산 우리노래에 주역으로 출연할 때 조연으로 출연하기도 하고 일이 없을 때에는 조상현명창에게 소리를 배우기도 했다. 또 오갑순이 방송활동과 공연활동을 활발히 할 때에도 한 동안 오갑순의 차를 운전했다. 운전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공연할 때는 장구도 처 주니까 자연히 일행이 되어 국악인으로 살아가는 생활이 되었던 것이다. 최우칠은 지금 국악계에서 누구보다 바쁘게 많은 일을 하며 살아가지만 그 생활이 그냥 물 흐르듯 그렇게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무엇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하는 일도 별로 없다. 본인이 국악을 좋아하고 국악인들을 좋아하니까 국악인 모두에게 좋은 일이 무엇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일을 꾸미게 된다. 그래서 만든 것이 국악노조다. 우리 사회 각 분야에 노조가 많이 만들어지는 ‘90년대 최우칠은 국악인들에게도 노조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술 마시는 자리에서 국악노조에 대해 얘기하면 호응하는 사람도 꽤 있었다. 그래서 노조를 만들었지만 각자 자유롭게 활동하는 국악인들이라 무슨 회비를 받을 수도 없고 하여 최우칠은 그냥 본인이 노조위원장이 되고 회비도 본인이 납부하면서 한국노총산하 국악노조를 만들고 위원장으로 행세하게 되었다. 그리고 국악방송이 계속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졌던 프로도 없어지는 경우가 있어 방송국이 국악프로를 없애지 말아달라는 궐기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종묘의 팔각정에서 궐기대회를 했는데 이성림·조상현·김영임·김뻑국·이은관 등을 비롯한 많은 국악인들이 모여 머리에 謹弔라는 띠를 두르고 한 나절동안 방송국을 성토하는 대회를 했었다. 그는 지금 국악노조위원장 외에 (사)한국국악협회 이사로 있으면서 국악협회의 각종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악제나 서울 국악제를 하면 으레 연출을 맡아하고 국악경연대회 등을 해도 역시 전체 진행을 맡아 중요한 일을 한다. 더러 지방자치단체에서 무슨 큰 국악공연을 할 때에도 초청하면 가서 연주도 하고 전체 연출도 하곤 한다. 최우칠은 오랜 세월 KBS.TV의 국악프로를 하면서 PD인 이상업·최공섭을 도와 많은 일을 했는데 그러면서 확실하게 배운 것이 연출하는 일이다. 워낙 많은 사례를 반복하여 경험했고 또 직접 해볼 기회도 많았기 때문에 지금은 국악공연연출을 하는데 무서움이 거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최우칠은 국악노조위원장으로 (사)한국국악협회 이사로 국악계를 위해 활동하지만 주된 일은 KBS민속합주단 단장으로서의 역할이다. 매주 수요일이면 KBS 국악한마당을 녹화하는데 각양각색의 국악프로그램에 반주를 담당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프로그램의 책임자가 바뀌면 프로의 경향도 달라지니까 거기에 적응하여 완성도가 높은 내용이 되게 하자면 역시 반주단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래서 녹화하는 일이나 공연하는 일은 늘 스릴을 느끼게 되고 그런 것이 최우칠에게는 무척 재미있는 일이 된다. 녹화나 공연 마치면 서로 어울려 한 잔 마시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고 그럴 때 재담으로 사람들을 웃기는 일도 재미있는 일이다. 최우칠은 지금 국악계 전체로 볼 때도 재담(와이당)을 제일 잘 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그는 국악이 좋아서 국악을 하고 국악인들이 좋아 서로 어울리고 많은 사람들이 웃는 것이 좋아 재담을 하며 산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가는 곳마다 환영받고 서로 만나면 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365일 술을 마시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술의 종류가 소주에서 막걸리로 바뀌었다. 막걸리를 마시면서 달라진 것은 체중인데 깡말랐던 체구가 좀 볼륨이 생길정도가 되었다. 나이도 있고 하니 그런 체격이 더 중후해 보여 좋다는 생각도 든다. 본인이 좋아서 하는 국악이지만 그것이 국악계를 위해 좋은 일이면 더 좋은 것이니까 최우칠 파이팅을 외쳐주고 싶다 故 최종민교수 (철학박사, 국립극장예술진흥회 회장, 동국대문화예술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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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9-04
  • 밀양백중놀이
    밀양백중놀이 다음카페 --> http://cafe.daum.net/mbp1980 하용부선생 ? -->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42872.html 경상남도 밀양 지역에서 직접 농업 생산 활동에 참가하는 농민들이 논에서 김매기를 마칠 무렵인 백중(百中)을 전후하여 벌이는 놀이. 중요무형문화재 제68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놀이는 주로 논농사가 발달한 중부 이남 지역에서 보편적으로 전승되었으며, 지역에 따라 그 명칭과 놀이형태가 조금씩 다르다. 일반적으로 호미씻이라고 부르는데 ‘논매기가 끝나고 호미를 씻어둔다’는 뜻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호미씻이말고도 써레씻이(강원도), 길꼬냉이·대동굿·장원례·술멕이(전라도), 머슴날(전라도, 경상도), 백중놀이·풋굿·꼼배기·꼼비기·깨임말타기(경상도), 초연(草宴), 세서연(洗鋤宴) 등으로 그 명칭이 다양하다. 이 중에서 초연과 세서연은 풋굿과 호미씻이의 한자 명칭이다.[유래] 백중의 전통은 불교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불교에서는 이날 아귀보(餓鬼報)를 받는 중생의 구제를 위해 우란분재(盂蘭盆齋)를 열었는데, 불교의 수입과 함께 우리나라에도 전파되어 고려시대에는 왕실에서부터 민간에 이르기까지 일반화된 행사였다고 한다. 이처럼 불교의 명절이었던 백중은 조선 후기에 이앙법(移秧法)이 일반화하기 시작하면서, 농업과 연관된 세시 행사로 자리 잡았다. 논농사에서 가장 고된 일인 김매기는 대개 음력 7월 보름을 전후하여 끝나는데, 농민들은 이를 기념하고 즐기기 위해 그들만의 축제를 열었고 그 시기가 백중과 겹쳐짐으로써, 불교축제인 백중에 농민축제의 성격이 덧붙여진 것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밀양도호부조(密陽都護府條)의 영남루기(嶺南樓記)를 보면 “긴 강을 굽어 끼고 넓은 들은 평평히 얼싸 안고 있으며, 농사는 부지런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아 밀양은 예로부터 농업이 성한 곳으로서, 백중놀이의 전통 역시 강성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밀양 지역의 농민들이 전승해온 백중놀이는 김매기를 마친 일꾼들이 푸짐한 먹거리를 즐기면서 활발한 놀이 활동을 펼치는 것이었다. 풍물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놀이의 핵심은 그해 농사를 가장 잘 지은 ‘상일꾼’을 뽑아서 소의 걸채 또는 작두말 등에 태우고 삿갓을 거꾸로 씌우는 등의 가장을 시켜, 마을을 돌면서 음주가무를 즐기는 것이었다. 밀양백중놀이는 농민들의 백중놀이와는 구별되는 것으로서, 이 지역 한량들의 친목 조직이라고 전하는 보본계(報本契)의 들놀이에 그 뿌리를 둔 것이라고 한다. 이 들놀이의 중심적 연행은 ‘병신놀이(병신굿)’로서, 농민들이 일을 하다가 논두렁이나 밭두렁에서 쉴 때 병신춤을 추며 양반을 풍자한 데서 유래했다고 하지만 근거가 모호하다. 이 놀이는 1970년대에 들어 지역축제인 밀양아랑제에 첫선을 보였으며, 1972년부터 경남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였다. 이 대회에 처음 참가할 때의 명칭은 ‘병신굿놀이’로서 인사굿, 신풀이굿, 병신굿, 모듬굿 등을 연행하였는데, 그 뒤 명칭과 내용이 여러 번 바뀌었으며 1980년 제2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여하면서 놀이의 명칭을 ‘백중놀이’로 바꾸고, 내용도 오늘날 전승하는 것과 유사한 형태로 수정, 보완하였다. 이 대회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한 뒤 1980년 11월 17일, ‘밀양백중놀이’라는 이름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제68호가 되었다. [내용] 밀양백중놀이는 앞놀이, 본놀이, 뒷놀이 등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앞놀이는 잡귀맞이굿, 모정자놀이, 농신제 순으로 진행되는데, 제의적 요소가 강한 놀이로 구성되어 있다. 잡귀맞이굿은 놀이꾼들이 놀이판 가운데에 세운 농신대를 향해 삼배(三拜)를 하여 오방신장을 일으켜 잡귀를 막고 신이 내리도록 하는 것이다. 모정자놀이는 모심기와 논매기소리를 부르면서 모심고 논매는 동작을 흉내 내는 놀이이다. 이 놀이가 끝나면 씨름이나 들돌들기로 좌상, 무상, 숫총각을 뽑고 덧배기춤을 춘다. 흥이 고조되면 농신대 앞에 제물을 차리고 농신제를 지내는데, 이때 잡귀를 쫓기 위해 약쑥을 태운다. 농신대는 저릅대(삼대) 360개를 크게 네 부분으로 묶고 위에서부터 새끼줄 12개를 늘어뜨린 모양이다. 농신대의 네 묶음은 사계절을, 새끼줄 12개는 일년 열두 달을, 삼대 360개는 일년 360일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사방으로 네 가지 색깔의 베를 묶어 사선으로 당겨 매는데, 북쪽에는 흑색, 남쪽에는 적색, 동쪽에는 청색, 서쪽에는 백색을 각각 매고 중앙에는 황색을 감아 오방신장을 상징한다고 한다.본놀이는 앞놀이에 비해 극적 요소가 강한 작두말타기와 양반춤, 병신춤, 범부춤 등의 춤판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두말타기에서부터 시작하여 점차 신명이 솟구치면 양반이 머슴들의 놀이판에 끼어들어 양반춤을 추는데, 이러한 양반의 모습이 못마땅한 머슴들은 양반을 놀이판에서 쫓아내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병신춤을 춘다. 병신춤 대목에서는 곱추춤, 난쟁이춤, 꼬부랑할미춤, 떨떨이춤, 문둥이춤, 배불뚝이춤, 봉사춤, 절름발이춤, 중풍쟁이춤, 히줄래기춤 등 열 명의 배역들이 각자의 장기를 다양하게 보여준다. 이런 춤은 양반춤과는 대조적으로 자유분방한 분위기로 구경꾼을 격동시킨다. 놀이판에서 쫓겨난 양반은 이를 보고 흥겨움을 참지 못하여 의관을 벗어던지고 놀이판에 뛰어들어 범부춤을 춘다. 놀이판을 돌면서 입장하여 장구잽이와 대무를 하는 범부춤을 달리 벌춤이라고도 한다.뒷풀이는 오북춤과 화동마당으로 구성되는데, 놀이꾼과 구경꾼이 한데 어우러져 춤을 추며 노는 대동의 장이다. 오북춤은 풍물잽이 중에서 다섯 명의 북잽이들이 나와 역동적이 춤판을 벌이는 것이다. 흥겨운 덧배기장단에 맞추어 원형을 만들면서 조이고 푸는 것을 거듭하며 북배김을 하는데, 북배김은 북잽이들이 원심을 향해 모여들어 서로 마주 보며 북을 힘차게 치는 것으로서 가장 역동적인 부분이다. 오북춤은 오행과 오기가 순조롭고 오체가 성하며, 오곡이 잘되어 오복을 누릴 수 있도록 기원하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화동마당은 놀이꾼들과 구경꾼이 한데 어우러져서 한바탕 춤을 추며 신명을 맘껏 풀어내는 장으로서 이 놀이의 대단원을 이룬다.[지역사례] 전남 진도 지역에는 농사를 제일 잘 지은 집에서 하는 ‘장원례(壯元禮)’라는 놀이가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그 집 머슴에게 술을 권하며 위로하고, 얼굴에 검정칠을 하여 도롱이를 입히고 머리에 삿갓을 씌워서 우습게 꾸민 후, 지게나 사다리 혹은 황소 등에 태워서 마을을 돌았다. 머슴이 총각이거나 홀아비인 경우, 마을 어른들이 마땅한 처녀나 과부를 골라서 장가를 들여 주고 살림도 장만해 주는 풍습이 있었다. 경남 창녕의 영산에서는 서로 품앗이를 하는 머슴끼리 한패가 되어, 나이에 따라 상머슴·중머슴·새끼머슴 등을 정한 후 소에 태우고, 풍물을 치고 영각(나발)을 불며 성내를 한 바퀴 돈 후 주인집을 찾아다니면서 음주가무를 즐겼다. 경북 예천의 금당실에서는 논매기를 마친 후에 날을 잡아 잔치를 벌였는데 ‘풋구먹는다’고 하였다. 풋구를 먹기 전날에 농로를 수리(治道)한 뒤에 풋구날이 되면, 일꾼들의 우두머리인 ‘상일꾼’의 주도로 주인집에서 내온 푸짐한 먹거리를 먹고 마시면서 가무를 즐겼다. 풍물 반주에 맞추어 놀았는데, 상일꾼은 삿갓을 뒤집어썼다. [의의] 백중놀이는 고된 농업활동을 일단락 지은 농민들이 벌인 축제로서, 축제의 주체는 머슴과 소농이었고 지주 부농들은 이들을 후원하는 입장에 있었다. 축제가 벌어지는 동안, 머슴과 소농들은 맘껏 먹고 마시면서 신명을 풀어냈으며 지주부농들은 이를 용인하고 후원함으로써, 고용인과 피고용인, 지주와 소작인이 상생(相生)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편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밀양백중놀이는, 민속예술과 놀이 그리고 신앙을 바탕으로 구성한 공연물로서, 내고 달고 맺고 푸는 우리 마당놀음의 연행원리를 수용하여 신명풀이의 미학을 구현함으로써 뛰어난 예술적 성취를 이루었다.-->자료출처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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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9-03
  • 사물놀이
    우리는 훌륭한 전통 음악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즉흥곡인 시나위를 비롯해 여기서 독주곡 형태로 파생한 산조가 그런 예입니다. 그러나 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이름이 나 있는 우리 음악은 다름 아닌 사물놀이입니다. 사물놀이는 아마 세계에서 가장 다이내믹한 음악 가운데 하나일 겁니다. 엄청난 음량과 강한 비트에서 나오는 역동감 때문에 듣는 사람은 신명의 경지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아무리 축구장이 넓어도 사물놀이 한 팀만 있으면 한국 응원단은 다른 나라 응원단을 제칠 수 있습니다. 사물놀이가 내는 소리의 다이내믹함과 강도를 다른 나라의 악기가 따라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풍물 연주의 모습. 사물놀이는 풍물에서 유래했으나 구성과 형식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사물놀이의 탄생 사물놀이를 두고 오래 전부터 있어왔던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내용은 과거에 다 있던 것이지만 사물놀이가 이런 형식으로 태어난 것은 1978년의 일이랍니다. 사물놀이는 농민들이 하던 풍물에서 유래했습니다. 풍물패의 긴 대열은 크게 ‘앞치배’와 ‘뒤치배’ 등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이때 앞치배란 꽹과리, 소고, 장구, 북 등과 같은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을 말하고 뒤치배는 양반이나 각설이 등의 복장을 하고 춤을 추는 사람을 말합니다. 사물놀이는 앞치배에서 4개의 악기를 빼서 새롭게 구성한 음악입니다. 4개의 악기란 다름 아닌 꽹과리(쇠), 장구, 북, 징을 말합니다. 그리고 풍물은 모두 서서 연주하고 현란한 춤이나 다른 개인기들이 동원되는 것에 비해 사물놀이는 4개의 악기를 가지고 4명(혹은 여럿이)이 앉아서 풍물 가락을 연주 합니다. 그래서 사물놀이는 ‘앉은반’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립니다. 풍물놀이 가락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하여 탄생 사물놀이는 왜 이렇게 외양이 바뀌었을까요? 여기에는 현재 한국 사물놀이의 대표 상징처럼 되어 있는 김덕수씨와 그의 동료였던 김용배, 최태현, 이종대씨의 활약이 컸습니다. 이들은 남사당패의 후예들로서 70년대 대학에 불었던 탈춤 부흥 운동에 부응해 과거의 풍물 가락을 살리면서 현대화하자는 데에 의견을 모읍니다. 쉽게 말해 풍물을 현대인들이 접근하기 편하게 바꾸자는 것이었죠. 풍물은 과거 농경 사회에는 꼭 필요한 것이었지만 현대 도시산업사회에는 어울리지 않는 면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들은 이 풍물을 대폭 축소시켜 가장 중요한 악기라 할 수 있는 4개의 악기만 추려내어 실내, 즉 극장으로 끌어들입니다. 연주하는 형태도 앉아서 하는 것으로 바꾸었으니 더 실내에 적합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리메이크’해서 연주하던 중 이들은 당시 ‘공간사’라는 한국 최고의 건축설계 회사를 이끌고 있던 김수근씨와의 인연으로 드디어 사물놀이 첫 연주회를 개최하게 됩니다. 이들을 눈여겨보던 김수근씨가 1978년 2월 공간사랑의 소극장에서 발표할 수 있게끔 배려를 해준 겁니다. 당시 왔던 사람들은 공연이 끝난 뒤 처음 접한 사물 장단의 현란함과 역동성에 말을 잊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이때에 ‘사물놀이’라는 이름이 바로 정해진 것은 아닙니다. 이 이름은 민속학자인 심우성씨가 지어준 것이라고 하더군요. 원래 사물은 절에서 쓰는 용어로 북, 종, 목어, 운판을 지칭하던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전통음악에는 없던 사물놀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음악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세계적인 음악인 사물놀이는 이렇게 아주 최근에 만들어진 새로운 전통음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민의 역사와 함께해온 4가지 악기 그러면 사물놀이의 특징은 과연 무엇일까요? 사물놀이에 이용되는 네 악기 가운데 꽹과리는 천둥을 상징하고 장구는 비를, 북은 구름을, 징은 바람을 상징한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이 해석이 언제 생긴 것인지 확실히 모르지만 악기 소리가 자연 현상을 나타낸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연과의 친연성을 강조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물놀이의 진짜 특징은 이 음악이 어떤 음악보다도 한민족이 갖고 있는 신명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음악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김덕수 씨의 말에서도 확인이 됩니다. 그는 이 사물놀이가 단순히 전통 타악에 국한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사물놀이는 우리 민족의 피 속에 흐르는 유전자의 음악적 표현이자 현대 한국의 총체적 에너지라고 믿었습니다. 사물놀이에 사용되는 4가지 악기들은 실로 우리 서민들과 역사를 같이 했습니다. 전국 방방곡곡에는 이 사물이 없는 마을이 없었습니다. 이 악기들은, 일을 할 때에는 노동의 악기였고 풍년이 들면 축제의 악기였으며 마을굿을 할 때에는 종교적인 역할도 했습니다. 게다가 전쟁 때에는 군악으로도 쓰였다고 하더군요. 이것은 풍물 때 입는 옷이나 가락의 명칭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풍물패들의 옷이 조선 군사들의 옷과 비슷하게 생겼지요? 풍물에는 상모돌리기와 같은 중요한 순서가 있습니다. 이 순서에서는 상모꾼이 긴 끈이 달린 모자를 쓰고 나와 그 끈과 같이 춤을 추는데 김덕수씨의 말에 따르면 바로 이 상모꾼의 복장이 ‘전립’이라는 군사복이라는 겁니다. 게다가 전국의 풍물 가락을 보면 그 명칭에 일자진이나 천자진, 오방진과 같은 군사용어가 등장한다고 하네요. 무아경에 빠지게 하는 신명의 가락 이러한 사물놀이가 연주하는 곡으로 들어가면 꽤 전문적이어서 일반인들은 이해하기 힘듭니다. 예를 들어 ‘삼도풍물 가락’이나 ‘비나리’, ‘설장구 가락’ 등은 사물놀이의 유명한 레퍼토리인데 용어들이 많이 낯섭니다.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삼도풍물 가락인데, 이것은 ‘웃다리’, 그러니까 충청, 경기 지방의 풍물과 호남, 영남의 풍물 가락을 모아 재구성한 연주곡입니다. 이외에도 매우 다양한 연주곡들이 있는데 이 사물놀이 연주의 핵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무아경, 즉 엑스타시(ecstasy)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연주자들은 연주에 몰두하다 보면 어느 순간 무아경 혹은 황홀경에 빠져 들게 됩니다. 그때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연주자들은 바로 이 맛에 힘든지도 모르고 연주하는 데에 전력을 다한다고 합니다. 이때 연주자들은 다양한 리듬을 치밀하면서도 변화무쌍하게 구사해서 듣는 이가 리듬을 예측할 수 없게 만듭니다. 연주자가 이렇게 연신 신명의 가락을 뱉어내면 관객들도 간접적이나마 무아경을 경험하게 됩니다. 저도 사물놀이 연주를 들을 때마다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천천히 기운이 상승되다 어느 시점에서 정점으로 치닫는 느낌을 받습니다. 지금 사물놀이는 계속해서 변신을 꾀하고 있습니다. 여러 장르의 음악과 협연하여 다양한 퓨전 음악을 만들기도 합니다만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난타와 같은 새로운 음악의 배경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난타는 여러분께서 잘 아시는 것처럼 영국에서 유래한 스톰프(stomp) 등의 공연 형식을 따랐지만 리듬에는 사물놀이의 그것이 많이 가미되어 있습니다. 난타가 공전의 히트를 한 것은 사물놀이의 한국적인 장단이 들어가서 가능하게 된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우리의 사물놀이가 어떤 새로운 모습을 보일지 궁금해집니다. 글∙사진∙그림 최준식 /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한국학과 교수 서강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템플대학에서 종교학을 전공하였다. 한국문화와 인간의식 발달에 관심이 많으며 대표저서로는 [한국인에게 문화는 있는가], [한국의 종교, 문화로 읽는다] 등이 있다. --> 네이버캐스트 자료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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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9-03
  • 남해안별신굿
    --> 동영상으로 남해안별신굿 자세히 보기 자료출처--> 한국민속신앙사전 --> 남해안별신굿 다음카페 바로가기 집필자 : 오진호 (吳振昊) 정의 거제·통영 지역을 중심으로 해안마을과 도서지역에서 행하여지는 마을굿. 이 굿은 1987년 7월 1일에 ‘중요무형문화재 제82-라호’로 지정되었다.내용이 지역에서는 세습무에 의해 별신굿·오구새남굿·도신굿 등이 행해지는데 대대로 정씨·박씨·이씨·김씨·노씨 집안이 대표적으로 단골판을 현성하였다. 정씨는 거제도, 이씨는 통영 욕지도 및 인근 섬지역, 김씨는 한산도를 중심으로 단골판을 주도했으며 광복이후 거제신청과 통영신청이 통영으로 합쳐지면서 이 지역의 무가사설 및 무관(춤)이 통일되었다고 한다. 일제시대 때 아키바 다카시(秋葉隆)가 쓴 『조선민속지(朝鮮民俗誌)』에 거제도 별신대(別神竿)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내용은 소략하지만 오늘날 남해안별신굿과 동일하다. 이 굿의 제보자로 언급되는 무부 정철주는 현재 남해안별신굿 예능보유자인 정영만(鄭暎晩)의 증조부이다. 이후 1967년 문교부 문화재관리국의 마을 제의에 관한 설문지 조사(이 자료는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연차적으로 발간되었으며, 경남과 부산 지역의 자료는 2003년 『한국의 마을제당 제7권(경남ㆍ부산편)』으로 발간되었다)와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경상남도편(韓國民俗綜合調査報告書-慶尙南道篇)』에 1968년 사량도 양지리 능량동의 별신굿 무부 박경삼의 제보로 굿의 제차가 소개되어 있다. 본격적인 조사보고서로는 문화재관리국편의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무의식편(巫儀式篇)』 「통영지방의 무의식」을 들 수 있다. 여기에는 별신굿뿐 아니라 도신과 오구새남굿의 무악(巫樂)·무구(巫具)·무가(巫歌)사설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이후 남해안별신굿은 1987년에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초대 보유자로 정모연(鄭模蓮)이 지정되었으나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 당시 활동하고 있던 정모연·고주옥(高珠玉)·박복개·박복률 등이 타계해 전승의 어려움을 겪다가 정모연의 기능을 정영만이 전수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해안별신굿은 보통 정월 초하루에서 보름 사이에 행해지며, 요즘은 2일 정도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굿의 진행순서 및 석별 진행순서는 다음과 같다. 1. 들맞이 당산굿 : 마을에 도착한 일행이 길군악을 연주하면서 마을을 한 바퀴 돈다. 이는 마을의 수호신에게 도착한 것을 알리는 거리이다. 제차는 길연주, 청신악, 삼십삼천, 청신악, 넋노래, 허배, 대너리, 말미, 천근, 불림, 법성, 삼현, 공사, 수부, 맘자심, 송신악 순이다. 2. 굿장모댁 부정굿 : 굿장모(굿을 하는 동안 마을을 대표하는 제관)댁에 들러서 이 집의 부정을 씻는 절차이다. 제차는 청신악, 넋노래, 허배, 대너리, 조너리, 푸너리, 제석노래, 제만수, 삼현, 공사, 수부, 맘자심, 송신악 순이다. 3. 산신제(위만제) : 마을의 굿장모와 이를 보조하는 마을사람 1~2명이 당산에 올라가 마을 수호신에게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절차로 제물을 차려 제사를 모신 뒤 밤을 새운다. 4. 일월맞이(칠성굿) : 묵은해를 잘 보냈으니 돌아오는 해도 잘 보내게 해 달라고 하늘에 기원하는 굿이다. 제차는 칠천수, 청신악, 삼십삼천, 넋노래, 허배, 대너리, 말미, 천근, 맘자심, 제석노래(칠천수), 공사, 제석노래, 제만수, 삼현, 수부, 맘자심, 송신악 순이다. 5. 골맥이굿 : 일월맞이가 끝나면 메구를 치며 삼한대를 앞세우고 바닷가의 용왕굿을 하기 위한 장소로 내려온다. 6. 용왕굿 : 사행용왕신에게 바람을 막아주고 배의 안전과 만선의 풍어를 기원하는 굿이다. 이때 마을의 각 가정에서는 조상상을 차린다. 제차는 청신악, 삼십삼천, 넋노래, 허배, 대너리, 말미, 천근, 불림, 법성, 삼현, 공사, 수부, 맘자심, 송신악 순이다. 7. 부정굿 : 굿청의 부정을 씻고 제단을 정화하는 굿이다. 제차는 굿장모댁 부정굿과 동일하다. 8. 가망굿 : 가망할매에게 비와 바람을 막아주고 어업과 농사의 풍요를 비는 굿이다. 제차는 부정굿과 동일하다. 9. 제석굿 : 제석신에게 재수를 기원하는 굿으로, 제차는 부정굿과 같다. 10. 선왕굿(서낭굿) : 팔도선왕(서낭)을 다 불러 모셔서 동네 평안과 자손들의 무사를 기원하는 굿이다. 제차는 청신악, 대너리, 선왕풀이, 동살풀이, 조너리, 푸너리, 맘자심, 송신악 순이다. 11. 큰굿1) 손굿(1) 지동굿 : 동태부신령(마을의 시조)을 위한 굿이다. 제차는 청신악, 넋노래, 허배, 올림채 1ㆍ2ㆍ3장, 말미, 대너리, 천근, 대너리, 천근, 대너리, 천근, 맘자심, 송신악 순이다. (2) 손님풀이 : 마마(손님)에 걸리지 않도록 기원하는 굿이다. 제차는 대너리(징), 신가구연 순이다. 2) 고금역대 : 죽은 이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굿이다. 제차는 불림, 염, 맘자심 순이다. 3) 황천문답 : 평소에 지은 업보에 따라 지옥과 극락으로 가니 평소에 좋은 일을 많이 하도록 권장하는 굿이다. 제차는 불림, 염, 천근, 맘자심 순이다. 4) 축문 : 인생의 무상함과 망자의 제사 방법을 기록한 축문을 읽는다. 제차는 불림, 염, 맘자심 순이다. 5) 환생탄일 : 죄를 많이 지었다 하더라도 염불과 설법을 듣고 공역을 쌓으면서 지극정성으로 빌면 환생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제차는 불림, 염, 천근, 맘자심 순이다. 6) 시왕탄일 : 저승을 관장하는 열시왕을 모셔놓고 발복을 기원하는 굿이다. 제차는 염불장단, 접탄일, 불림, 염, 법성, 올림채 1ㆍ2ㆍ3장 순이다. 7) 대신풀이 : 돌아가신 선대무당들을 추모하는 굿이다. 제차는 수부, 맘자심 순이다. 12. 군웅굿 : 장군과 동네에 공로가 있던 분들을 모셔놓고 동네 평안과 명복을 기원하는 굿으로 공사가 없다. 제차는 청신악, 넋노래, 허배, 대너리, 조너리, 푸너리, 제석노래, 제만수, 삼현, 수부, 맘자심, 송신악 순이다. 13. 시석(송신굿) : 모든 잡신과 구천을 떠도는 영혼들을 동참시켜 풀어먹이는 굿이다. 용왕굿을 할 때 차렸던 조상상의 제물을 바다에 던진다. 이때 던지는 밥을 용왕밥이라고 한다. 순서는 제석놀이, 제만수, 육갑풀이(육십갑자), 맘자심, 개기(메구나리) 순이다. 14. 띠뱃놀이 : 동네의 묵었던 액을 띠배에 실어 멀리 보내는 굿이다. 마을에 따라 생략하는 경우도 많다. 이외에도 탈굿(탈놀음)인 중광대, 해미광대, 망석놀림이 있었으나 현재는 잘 하지 않는다. 남해안별신굿의 굿제차는 크게 잔삭다리굿과 큰굿으로 나눌 수 있다. 잔삭다리굿은 부정굿, 가망굿, 제석굿이며 이때의 무녀는 큰머리를 쓰지 않고 조너리·푸너리·제석노래·제만수 등의 장단을 쓴다. 잔삭다리굿과 큰굿에도 속하지 않는 굿제차 중에서 일월맞이, 용왕굿은 ‘석을 크게 잡는다’고 하며 무녀는 큰머리를 쓰고 주로 말미·불림 장단을 사용한다. 지동굿, 손님풀이, 고금역대, 황천문답, 축문, 환생탄일, 시왕탄일을 묶어서 남해안별신굿에서는 큰굿이라 말한다. 무녀는 큰머리를 쓰고 무가는 서사무가와 교술무가가 중심이 된다. 손님풀이는 강남에서 온 손님의 노정기를 그린 서사무가이며 고금역대·황천문답·축문·환생탄일·시왕탄일은 기원과 교훈적인 내용의 교술무가이다. 남해안별신굿의 장단은 2소박 5박자의 말미·불림이 특징적인데 동해안별신굿의 청보3장과 구조가 같다. 무가의 선법은 육자백이 토리이나 전라도지역의 육자백이 토리처럼 시김새를 강하게 주지 않고, 경상도 사투리를 쓰기 때문에 메나리토리의 느낌이 난다. 악기구성에서 대금·피리·북 등이 쓰이는 것은 전라도 및 경상도 남부지역의 무속음악의 공통적인 특징이나 장구의 크기와 치는 법은 경상도지역 무속음악과 비슷하다. 남해안별신굿은 경상도 무속의 성격과 전라도 무속의 성격을 공유하고 있으며, 인근 남해군·사천시·고성군·진해시·마산시 등지에서도 별신굿을 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거제ㆍ통영 지역의 별신굿과 유사한 형태가 연행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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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9-03
  • 판소리란?
    ☆ 자료출처 : --> 브리태니커소리하는 이가 혼자 서서 몸짓을 해 가며 노래와 말로 <춘향전>이나 <심청전> 같은 긴 이야기를 엮어 나가는 우리 전통 음악의 한 갈래가 판소리이다. 이것에는 북 반주가 곁들여지며, 북 치는 이는 소리에 맞추어 "얼시구" 하고 외쳐서 흥을 돋구기도 한다. 판소리가 지금은 흔히 극장놀음이나 방안놀음으로 벌어지지만, 옛날에는 판놀음으로 벌어졌다. '판놀음'이란 여러 패의 놀이꾼들이 너른 마당을 놀이판으로 삼고, '판을 짠다'하여, 순서대로 소리, 춤, 놀이 따위를 짜서 벌이는 것을 한데 묶어 일컫는 말이다. 판놀음으로 벌이는 놀음에는 '판'이란 말이 붙는다. 판놀음에서, 줄타기는 '판줄', 농악은 '판굿', 춤은 '판춤', 염불은 '판염불', 소고 놀음은 '판소고'라고 한다. 따라서 판놀음에서 하는 소리가 '판소리'이겠다. 그러면 '소리'는 무엇이며, '소리하기'란 무엇일까? "소리 한자리 해라", "소리를 잘한다"와 같은 예스러운 표현에서, 또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김매기소리, 상여소리와 같은 말에서 우리는 그것이 '노래' 또는 '노래하기'와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판소리라는 말은 우리나라의 토박이말이다. 옛날에는 이를 잡가, 극가, 창가, 본사가 따위의 한자말로 쓰기도 했으나, 요즈음에는 그런 말들을 쓰지 않는다. 판소리하는 이를 옛날에는 창우, 가객, 광대 또는 소리꾼이라고 불렀는데, 오늘날에는 일정하게 쓰는 말이 없다. 북치는 이는 고수라고 부른다. 판소리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을 '소리한다'고 하는가 하면, 말하는 것을 '아니리한다'고 하고, 몸짓을 하는 것을 '발림한다'고 한다. '발림이 좋다'는 말은 '너름새가 좋다' 또는 '사체가 좋다'라고도 한다. 그리고 북치는 고수가 북을 치면서 알맞은 대목에서 "얼씨구, 좋다!" 또는 "으이, 좋지!" 따위의 말을 외치는 것을 '추임새한다'고 이른다. ● 판소리는 우리 역사와 희노애락을 함께 해온 우리문화의 정수로 그 독창성과 우수성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2003년 11월 7일 유네스코 제2차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었다. -->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 판소리보존회 홈페이지 --> 고창 판소리박물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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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9-02
  • 우리지역 문화재 진주교방굿거리춤 (경남도민신문)
    경남무형문화재 제21호 정·중·동의 신비로운 매력 진주교방굿거리춤은 진주 교방에 의해 전승되고 있는 굿거리춤으로 1997년 1월 30일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되었다. 교방이란 기녀(妓女)들의 악·가·무(樂·歌·舞)를 가르치던 기관을 가리키며 무속금지령에 의해 무당이 교방으로 들어가면서 시작된 춤이기에 교방굿거리춤이라 일컫게 되었다. 교방굿거리춤은 굿거리장단인 자진타령가락으로 시작하여 염불가락에서는 타령가락보다 자진가락이 많이 들어간다. 차분하면서 끈끈하고, 섬세하면서 애절한 느낌을 준다. 진주교방굿거리춤은 한국춤의 신비롭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잘 나타내고 있는 전통무용으로 진주에 사는 김수악씨와 보존회에서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진주교방굿거리춤은 1900년대 이후 승무와 더불어 예기들에 의해 교방에서 예술적으로 다듬어졌으며, 고종 황제시 궁중무희였던 최완자씨가 1940년대부터 전통무용으로서 지도하셨고, 당대 명기들로 하여금 판소리와 함께 연출하였으며 춤사위의 이름도 음악의 창법이나 가락의 호칭과 혼합하여 쓰게 되었다. 춤의 성격은 차분하면서 끈끈하여 섬세하면서 애절한 무태로서 정·중·동의 신비롭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어 무아지경에 이르게 하는 매력을 갖추고 있다. 이 춤은 조선조의 하락으로 관기제도가 금지됨으로써 궁중예기들이 기녀조합을 결성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가·무·악으로 그들의 생업을 삼게 되었다. 한편 무축의 금지령에 의해 무당이 사찰과 관기로 분화되면서 무무가 기방으로 이입된 것이 발단이 되었다. 교방에서는 이 춤사위를 교방굿거리춤으로 까지 승화시켜 오늘에 이른 것이다. 김봉철 기자 --> 기사 원문보기 진주교방굿거리춤 [ 晉州敎坊─ ] 진주 지방의 교방에서 추어지던 춤. 다른 말로 기방굿거리·굿거리춤·수건춤·입춤으로 불리어진다. 이 춤은 주로 3분박 4박자에 맞추어 추는 춤으로 고려 문종때 들어와 고려, 조선조를 통하여 1900년대 이후 승무와 더불어 여기들에 의해 교방에서 예술적으로 다듬어져 왔다. 궁중의 각종 연회에서 중요한 레파토리로 가장 많이 상연되어져 왔으며 9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전승되어져 오고 있는 문화재적인 놀이춤의 하나이다. 춤의 발단은 조선조의 몰락으로 관기제도가 폐지됨으로써 궁중 여기들이 기녀조합을 결성하여 그곳에서 가(歌)·무(舞)·악(樂)으로 그들의 생업을 이어가는 한편 무속의 금기령에 의해 무당이 사찰과 관기로 분화되면서 일부 무무(巫舞)가 기방으로 이입된 것이 발단의 시초이다. 이 춤의 보유자인 김수악(金壽岳)은 1930년대 전통무용으로 승화시킨 한성준과 1940년대 이 춤을 지도했던 고종시 궁중무희였던 최완자 그밖에도 김옥민·김녹주 등에 의해 사사받아 전승보존되어져 오고 있다. 이 춤은 당대 명기들로 하여금 판소리와 함께 진행·연출하였으며 춤사위의 이름도 대삼·소삼·잉어걸이·완자걸이 등 음악의 창법이나 가락의 호칭과 혼합하여 쓰고 있다. 이 굿거리춤은 한국춤의 네가지 요소인 한·흥·멋·태를 고루 갖추어 보여주는 춤으로 정립되어져 춤의 성격은 차분하면서 끈끈하여 섬세하면서 애절한 무대로서 정·중·동의 신비롭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어 무아지경으로 이르게 하는 매력을 갖추고 있다. 1997년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되었다. 자료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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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9-02
  • 정선아리랑 전수관
    아리랑전수관: 033-560-2897 전수관동 1층은 창기능 전수를 위한 전수실과 정선아리랑 자료실이 있으며, 2층에는 정선아리랑 공연장, 전수실, 영상시설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또한 창밖으로 아우라지 전경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관련정보 더보기 --> http://goo.gl/Ybx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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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9-01
  • 내가 하고 있는 일들.. 최종민
    나는 매일 fm99.1mh 국악방송을 9시부터 11시까지 2시간 동안 생방송으로 진행하고 있다. 토요일과 일요일분은 녹음을 하니까 5일간 국악방송국에 가서 방송하는 셈이다.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은 야간으로 월요일과 화요일에 수업을 하고 한국음악전공의 학생들이 25명정도 재학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겸임교수이지만 실제로는 과주임처럼 매학기 강의를 개설하고 강사를 섭외하는 등 행정업무의 일부까지 하고 있다. 12년째 그렇게 한국음악전공을 지도한 보람이 있어 많은 졸업생들이 전통음악분야에서 상당한 기여를 하게 되었고 더 좋은 학생들이 이 대학원을 지망하여 나의 지도를 받고 있다. 서울시의 문화재 위원은 '80년대에 한 번 했고 2009년부터 2010까지와 2011부터 금년까지 세번째의 위원을 하고 있는데 작년부터는 제3분과인 무형문화재 분과의 위원장을 맡아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 지난해 2011부터 구례의 동편제소리축제 추진위원장을 맡아 일하고 있는데 작년에는 그런대로 의미있는 축제를 했고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자부한다. 다른 축제와 차별화되는 동편제 판소리를 제대로 조명하고 위상을 높이는 그러면서도 군민들이나 대중들과 더 친숙해 지는 판소리 축제를 했다고 자부하고 있다. 금년은 작년의 경험을 토대로 더 알차고 멋진 전국에서 주목하는 판소리축제가 되도록 할 작정이다. 나는 국립극장예술진흥회를 맡아 한 때는 문화학교를 운영하는 등 많은 일을 했었지만 지금은 명칭 뿐인 사단법인체를 이끌어가고 있다. 지난 해 안동과 과천 실학박물관 등에 가서 공연 활동을 좀 하긴 했지만 상당히 침체된 활동을 한 셈이다. 금년에는 좀 더 진용을 가다듬어 새로운 활로를 찾아 보아야겠다는 생각이다. 내가 지금 제일 공을 들이는 작업은 음악의 모국어를 가르치는 이론과 방법을 책으로 내는 일이다. 겸해서 교재까지 개발하여 우리나라 음악교육이 명실상부한 한국의 음악언어를 가르치는 교육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100여년 동안 서양을 열심히 배웠고 이제는 서양을 넘어서려 할 정도로 많은 성취를 했다고 본다. 지금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방향을 바꾸어 우리 것을 가지고 세계로 나가는 일인데 우리가 우리 것 특히 우리 음악언어를 사용하는 능력을 상실한 상태이기 때문에 우리의 음악언어를 가르치자는 것이다. 한국 말이 가장 잘 표현되는 우리노래를 만들고 누구나 쉽게 몸과 마음으로 부를 수 있는 우리노래를 부르도록 해야한다. 우리 민요를 교재로 우리음악의 사투리까지 체계적으로 익힌다면 멀지 않아 우리 모두 우리네의 음악언어를 터득하여 옛날 마을 사람들이 따로 배우지 않아도 모심을 때 모심기 노래하고 김 맬 때 김매기 노래했던 것 처럼 이 시대 우리가 필요로 하는 노래를 누구나 어울려 개성있게 표현하며 부르도록 해야한다. 그런 일이 제대로 되도록 운동을 벌이며 논리와 방법을 개발해 주고 교재를 만들어 구체적으로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 내가 가장 정성을 쏟고 있는 일이다. 창의성과 심미안을 기르려면 음악의 모국어를 가르쳐야 된다는 나의 주장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도록 우선 매력 있는 책을 완성하는 일이 급선무이다. 여러 지인 친구들의 성원을 바라마지 않는 바이다. 2012년 1월 30일 최종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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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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