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국악정보
Home >  국악정보  >  국악인소식

실시간
  • [謹弔] 국악인 '박정아' 명창 암 투병 끝 별세… 김태연, 스승 마지막 길 지킨다
    국악인 박정아(49) 명창이 유방암 투병 끝에 2월 14일 세상을 떠났다. 가수 김태연(11)은 장례위원으로 스승의 마지막 길을 지킨다. ▶박정아 프로필 박정아 명창은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고법 이수자다. ‘미스트롯2′에 출연한 국악 신동 김태연을 비롯해 많은 국악 인재를 길러냈다. 2000년 보성소리축제 전국대회 명창부 대통령상을 받았다. ‘국악신동’으로 알려진 김태연이 박정아 명창의 제자다. 고인은 생전 김태연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2020년 채널A ‘아이콘택트’에 출연해 암 투병 중 사실을 고백하며 “제자들이 떠날 때 암 선고받을 때보다 더 힘들었다”며 “태연이가 ‘선생님 다 떠나도 저는 안 떠날 거다’고 위로해 줬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저한테는 태연이가 특별한 제자다. 아픈 손가락”이라고 했다. ▶ 해당기사 더보기
    • 국악정보
    • 국악인소식
    2024-02-16

실시간 국악인소식

  • 군산의 마지막 권번 출신 기생(妓生) 김난주 할머니
    "기생질 허고 싶어 시집서 두 번 도망쳤지" [인터뷰] 군산의 마지막 권번 출신 기생(妓生) 김난주 할머니동네 회갑연에 초대되어 헌수를 도와주는 김난주(좌) 45세 때 모습. 윤기 흐르는 머리가 시선을 끈다.(1971년) 칼바람이 볼을 때리던 지난 2011년 12월 15일. 군산의 마지막 권번(가무를 가르쳐 기생을 양성하는 곳) 출신 기생(妓生) 김난주(85) 할머니를 찾았다. 60년 가까이 이웃으로 살아온 김 할머니 댁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골목 끝 집이었다. 좁고 짧았지만, 6~7가구가 오무래 오무래 살던 골목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모두 떠나고 김 할머니네 한 집만 남아 고요가 흐르는 골목을 지키고 있었다. 금방 갈아놓은 먹물처럼 번들번들하던 기와지붕이 세월의 풍상에 시달리다 깨지고 탈색되어 마음을 짠하게 했다. 대문을 여는 순간 옛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기생'을 천시하던 시절 김 할머니 댁은 동네에서 조카 이름을 딴 '정선이 고모네 집'으로 통했다. 허물없이 가깝게 지내는 어른들은 '난주네 집'이라 불렀으며, 아이들은 접근하기 어려운 금단의 구역으로 '기생네 집'이라고도 했다. 누가 들을까 봐 쉬쉬하면서. "안녕하셨어요?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아~니, 이게 누구랑가···. 그랴 맞어, 나는 누군가 했제.(웃음) 추운 날 어쩐 일이당가. 어여 안으로 들어와. 우리 집을 다 찾아오고, 참말로 별일이네!" 꼬부랑 할머니가 된 김 할머니는 처음엔 "누구랑가?"하며 고개를 갸웃하더니 3초도 지나지 않아 알아보고는 반가워하며 안방으로 잡아끌었다. 김 할머니는 예상대로 홀로 외롭게 살고 있었다. 옛날에는 친정어머니와 장애인 남동생, 조카 둘, 해서 다섯 식구였다. "그전에는 마당에 장독대랑 샘이랑 있었는데 모두 사라졌네요." "그~라제 조카사위가 고쳐줬어. 그나저나 웬 날이 이렇게 추워, 다리 밑에 거지들 모다 안 얼어 죽었는지 모르겠네. 그쪽은 차니께 이리~이리 아랫목으로 내려오라고. 커피 타줄까? 여그 귤도 하나 먹어보고. 참, 점심은 먹었능가?" 미수(米壽)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목소리 마디마디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낮게 깔린 목소리에는 해학과 풍자가 깔려있고, 끌리듯 당기듯 튕기듯 하면서도 애틋함이 묻어났다. 약간의 수다스러움은 판소리 춘향가에서 월매가 야밤에 찾아온 이몽룡을 반기는 대목을 떠오르게 했다. 평생을 소리(唱)와 함께 살아왔으니 그 여운이 어찌 남아있지 않으랴. "가시네 때 '바람피던' 생각만 나고 못 살겠드라고" ▲ 일본어 교육을 받는 일제강점기 권번 기생들.(김중규의 <군산역사 이야기> 스캔) 김난주(金蘭珠)는 본명으로 1927년 전북 순창 산골에서 태어났다. 예능에 기질을 타고난 그는 어려서부터 기생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스무 살까지 '바람'을 피웠단다. 이곳저곳으로 가무를 배우러 다녔던 것이다. 그러나 부모의 강권으로 결혼식을 올려야 했다. "남원의 안(安)씨 집안으로 시집을 갔는디, 남편은 집에서 글이나 읽는 학자였어. 그리도 어떻게 혀. 그럭저럭 살다 보니께 애기를 하나 낳았는디 어렸을 때 죽어 버렸어. 가시네 때 바람피던(가무 배우던) 생각만 나고 못 살겠드라고. 기생질 허고 싶어서 도망쳤지.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스스로 생과부를 택한 김난주는 스물두 살 되던 해 군산으로 이사한다. 변두리에 방 두 개를 얻어 친정어머니와 남동생과 함께 살았다. 곧바로 소화권번에 입소하여 이기권, 김준섭 등에게 판소리와 장구를 배웠다. 그때 만난 장금도(84, 민살풀이 전승자)와는 60년 넘게 친구로 지내오고 있다. ▲김난주 20대 모습. 우리 소리가 좋아서 기생이 되려고 했다고. 김난주는 동료들에게 '타고났다!'라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구음(口音) 구사를 잘했다. 춤을 추거나 악기를 배울 때 입으로 "나니나~ 나~나니~ 나리룻···" 하며 장단을 맞추다가 그 자체가 음악이 된 구음은 춤판이나 잔치판 등의 흥을 돋워주는 최고의 반주가 되었다. 스물네 살부터는 명월관, 근화각, 동해루, 쌍성루 등 큰 요릿집은 물론, 잔칫집으로 '밤 마실'을 나가기도 했다. 권번의 원칙은 4년을 마치고 시험을 거쳐 허가증을 받아야 하지만 워낙 목(소리)이 좋고 장구 솜씨가 뛰어나 권번에서 눈감아주었다. 김난주 인기는 대단했다. 집에서 곱게 화장하고 있으면 어김없이 권번소속 예기 양성소에서 보낸 인력거가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명월관 방마다 영화배우 닮은 김난주를 찾는 손님이 넘쳐났고, 마루에서 '뽀이'(boy)들이 서로 당기는 바람에 저고리가 찢어지기도 했다. "팁은 한 시간에 기본 2원이었제.(당시 쌀 한가마니 값이 6원) 그러나 두 시간 놀고도 50시간 100시간으로 달아주는 고마운 손님도 있었어. 이런 얘기는 쪼까 거시기 헌디, 손님이 연애를 걸어오기도 혔는디, 마음에 들믄 잠자리를 하기도 했제. (웃음) 하룻밤 사랑이 10년, 30년, 평생을 가는 경우도 있었응께. 그란디 지금은 다 흘러간 꿈이 돼야 뿌렀어!" 다섯 식구 '가장'으로 살아온 인생... 상갓집에서 초대 받기도 ▲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시기인 20대 후반 김난주의 모습. 김난주는 동네에서도 미인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당시 인기 영화배우였던 이경희와 빼닮은 미인으로 알려졌었기 때문. 동료 기생들은 물론 요릿집 손님들은 영화배우 이경희 언니가 행차했다고 반기며 서로 옆에 앉히려고 다툼이 일기도 했다. 20대에 가장이 된 김난주는 열심히 노력했다. 인기 '짱'이었던 그는 1년 남짓 모은 돈으로 'ㄱ'자 기와집도 장만하고. 몸이 불편한 남동생도 장가를 들였다. 친정어머니 수발도 극진히 했다. 조카를 둘이나 보면서 행복을 느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였다. 올케가 남편(동생)과 젖먹이 딸 둘을 놔두고 집을 나가버렸기 때문이었다. 친정어머니가 있다고 하지만, 직장과 집, 양쪽으로 시달려야 했다. 올케가 없는 빈자리를 메워 줘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반세기가 넘는 세월을 조카들 엄마 노릇을 하면서 애처롭게 살아왔다. 그래도 결혼해서 50대 중반이 된 조카들이 엄마처럼 대한단다. ▲ 충청도 광천 부잣집 환갑잔치 마당에서 장구로 흥을 돋우는 김난주.(1973년) 1960~1980년대 김난주는 주로 환갑이나 잔칫집에서 초청을 받고 외출을 나갔다. 동료 기생 2~3명이 함께 가서 자식들이 차례로 부모에게 술잔을 올릴 때 옆에서 도와주며 유창한 선율로 "받으시오, 받으시오, 이 술~ 한~잔을 받으시오"로 시작하는 권주가를 불렀다. 부모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헌수(獻壽)가 끝나면 차일이 쳐진 마당에서 놀이판이 한바탕 벌어졌다. 놀이판에서는 장구, 북, 창, 구음 등으로 분위기를 잡아주었고, 손님들과 환갑을 맞은 본인이 소반에 팁을 놓아주며 흥을 돋우었다. 군산뿐 아니라 김제, 부안, 전주, 이리(익산), 충청도 등지에서도 초청을 받았다. 1박을 해야 하는 충남 대천이나 광천, 부여 등에는 친구이자 민살풀이 일인자인 장금도와 함께 다녔는데, 군산에서 왔다는 기생들을 보려고 몰려든 구경꾼이 잔칫집 마당을 가득 메웠다. 상가(喪家)에서 초대를 받기도 했다. 일반 서민들은 엄두도 못 내지만, 망자가 생전에 벼슬을 했거나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집에서는 출상하는 날 기생을 불렀다. 애절한 소리로 저승으로 향하는 망자의 친구도 되어주고 길잡이도 돼주기 때문이었다. 기생이 요령잡이를 한다는 소문이 초상마당에 돌면 서로 상두꾼을 하려고 모여들었다. 머리에 흰 끈을 질끈 동여맨 기생이 상여에 올라 요령을 흔들면서 청아한 목소리로 만가를 선창하며 이끄는 꽃상여는 그 자체로 대단한 볼거리였으며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 옛날 나비들도 모두 저 세상 사람이 되었어!" ▲ 1960년대 중반 여름 피서지에서 동료들과 함께. 맨 앞이 장금도. 세월의 변화는 물의 흐름과 같아서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법. 40대 후반부터는 외출(잔칫집 행사)이 잦아졌다. 미제 깡통문화에 길들여진 한량들로 세대교체 되면서 우리의 전통 창(唱)에서 벗어나 신식가요를 즐기는 손님이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구음 구사가 뛰어나 버틸 수 있었다고 한다. 나이가 들수록 악기 다루는 솜씨가 능숙해지고 창법도 원숙해지면서 50~60대에는 학원을 개설해서 후배를 가르치기도 하고, 선후배 기생들과 모임을 만들어 내장산, 속리산 등으로 야유회를 다니며 덧없는 세월에 허전해진 마음을 달래기도 했다. 호호백발이 된 김난주 할머니가 기억하는 기생 동료는 민살풀이 일인자 장금도를 비롯해서 금선이, 옥주, 채선이, 혜영이, 난영이, 도심이 등. 그러나 대부분 죽거나 타지로 나가 살고, 장금도만 군산에 살면서 전화로 소식도 전하고 사는 얘기도 나눈단다. 권번에 발을 늦게 들여놓아 기생 경력이 짧지만, 애틋한 사랑을 주고받았던 남자도 몇 된다고 털어놓는 김난주 할머니. 그러나 "지금은 시든 꽃이 돼 뿌렸고, 그 옛날 날아들던 나비들도 모두 저 세상 사람 되었어!"라며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 오마이뉴스 기사원문보기
    • 국악정보
    • 국악인소식
    2012-08-28
  • [지음지교를 꿈꾸며] 연극인 이윤택 씨와 중요무형문화재 하용부 씨
    --> 밀양백중놀이 다음카페 바로가기 밀양 춤꾼 어깨춤에 팍 꽂힌 비주류 작가 “평생 같이 갈 겁니다” 밀양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부터 춤만 추고 살았던 춤꾼 하용부 씨(57·중요무형문화재 제68호 밀양백중놀이 예능보유자)와 부산에서 태어난 문인 출신 연극인 이윤택 씨(60). 얼핏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사람의 삶의 궤도는 1988년 부산의 가마골 소극장에서 우연히 교차했다. 둘은 이 만남이 자신들의 삶의 궤도를 바꿔 놓았다고 말한다. “거기서 특별 공연으로 춤을 췄어요. 공연 뒤 까맣고 자그마한 사람이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다가오더니 대뜸 ‘같이 연극 해보지 않을래요?’ 묻는 거예요. ‘저 놈이 미쳤나? 춤추는 사람이 연극을 왜 하냐’라고 속으로 웃어넘겼죠. 연극판에서 이름깨나 날리던 이윤택이란 건 전혀 몰랐죠.”(하 씨) 이 씨는 연극에서 진정한 모국어의 율격과 이미지를 찾으려 모색하던 중 하 씨의 춤과 마주쳤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1980년대 문학계는 ‘해체’와 ‘실천’의 두 축이 있었는데 그는 ‘해체’ 쪽이었다. 권위주의로부터의 해체, 근대성, 식민주의, 사대주의로부터의 해체를 그는 모색했다. 우리가 쓰는 언어가 왜곡되고 굳어 있다고, 현대시가 신라의 향가, 고려 속요보다 못하다고 봤다. “우리 고유의 리듬, 움직임을 찾으려고 굿판도 기웃거렸는데 그때 그의 춤을 본 거예요. 교방춤은 형식미를 추구하는데 그의 춤은 삼박자로 움직이는 게 굉장히 자유로웠어요. 호흡만 가지고 어깨춤을 추는데, 와∼. 그의 표정, 어깻짓, 발짓. 제가 찾는 게 다 있었죠.”(이 씨) 그 이듬해 하 씨를 설득하려고 밀양까지 찾아갔다. 선물이라며 커다란 괘종시계를 품에 안고 온 모습을 하 씨는 생생히 기억한다. 워크숍에서 배우들에게 강의 한번 해달라는 부탁을 하 씨가 수락하면서 시작된 두 사람의 ‘예술적 동거’가 올해로 24년째다. 9일 두 사람을 만나기 위해 밀양연극촌을 찾았다. 극단 연희단거리패를 이끌던 이 씨가 1999년 단원 50여 명을 이끌고 만든 연극 공동체다. 서울도 자주 오가는 두 사람을 굳이 밀양에서 만난 것은 두 사람의 예술적 터전인 밀양에서 인터뷰를 하는 게 마땅하다는 하 씨의 고집 때문이었다. 서울과 부산에 극장을 두고 활동하던 이 씨가 밀양에 연극촌을 세운 것도 하 씨가 이곳 토박이이기 때문이다. 만남 이후 두 사람은 서로에게 풍성한 예술적 자양분이 됐다. 이 씨는 하 씨를 통해 한국적 몸짓을 연극에 접목한 ‘이윤택의 연기론’을 완성했고 지난해 이를 집대성한 책 ‘영혼과 물질’을 펴냈다. “우리는 변증법적 관계예요. 전 춤을 못 추지만 하용부의 춤을 보고 그 원리를 깨달았어요. 호흡의 원리도 깨쳤고 연극에 적용했죠. 그런데 정작 하용부는 그걸 몰라. 할배 모방춤이거든. 나는 현상에서 개념을 발견하고 이걸 하용부에게 다시 넣어준 거지. 그냥 춤꾼이던 그가 (나 덕분에) 창조적 아티스트가 된 거야. 하하.”(이 씨) 하 씨는 다섯 살 때부터 할아버지 하보경 옹(중요무형문화재 제68호 밀양백중놀이 예능보유자·1997년 별세)에게서 춤을 배웠다. “맞아요. 사람들에게 ‘이윤택이 하용부의 스승’이라고 합니다. 그를 못 만났으면 춤이나 추고 (인간)문화재나 되려고 했겠죠. 한번은 그가 제 춤을 보더니 ‘하 선생, 허리가 너무 구부정해. 허리를 펴야지’ 하는 거예요. 제가 춤을 일흔이 넘은 할아버지께 배웠으니 자세가 저도 모르게 노인처럼 구부정했던 거죠. 춤에 앞서 신체의 개념으로 보니까 제 춤이 이해가 되더라고요.” 하 씨는 이 씨가 연출한 작품 대부분의 안무를 맡았고 ‘오구’, ‘햄릿’ 등 주요 작품에는 배우로도 출연했다. 하 씨의 춤 공연에는 이 씨가 적극적인 조언자 역할을 했다. 2009년 초 프랑스 파리의 ‘상상축제’에 초청된 하 씨가 바스티유 오페라원형극장에서 단독 공연을 앞두고 리허설을 할 때도 그랬다. “하용부가 무대에서 춤을 다 춘 다음 처음에 앉아 있던 의자로 다시 돌아가 앉더라고요. 그래서 ‘그건 우리 방식이 아니다’고 그랬어요. ‘객석으로 나가 관객에서 손을 내밀라’고.” 하 씨는 이 말대로 객석으로 내려가 할머니 한 분을 일으켜 함께 춤을 췄다. 기립박수가 쏟아졌고 현지 신문들은 호평을 쏟아냈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한국문화는 ‘풀이’라고 했어요. 우리 문화는 풀어내는 것이지 완결성이 아니라는 건데 이게 정말 맞거든. 무대에서 풀어낸 걸 객석에 안겨주니까 감동받는 거지. 그게 바로 소통이라니까요.”(이 씨) 성격적으로도 두 사람은 서로 보완하는 관계다. “이윤택은 성격이 ‘지랄’ 같고 저는 이 선생 때문에 화난 사람들을 달래는 역할을 하다 보니 외부 사람들이 ‘하용부는 좋은 사람, 이윤택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죠. 사실은 아니에요. 배우와 스태프에게 제가 그럽니다. ‘이윤택은 욕을 하면서도 너희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다. 나는 책임 못 진다’고.” 2008년 밀양연극촌에서 독립해 ‘밀양전통예술촌’을 운영하던 하 씨는 지난해 이 씨의 부탁으로 다시 연극촌 촌장을 맡았다. “우리는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이죠. 티격태격하더라도 결국은 평생 같이 갈 겁니다. 하하.”(하 씨) 동아일보 밀양=김성규 기자 --> 기사 원문보기
    • 국악정보
    • 국악인소식
    2012-08-28
  • 권오춘 국어고전문화원 이사장의 양평 한옥 초은당
    다섯 번 옻칠한 대청… 그 위에서 사뿐사뿐 선비춤 드디어 초은당에 간다. 여러 자리에서 여러 입으로 분분하게 소문이 나부꼈던 집이다. 옻칠을 아홉 차례나 하면서 돈을 종이처럼 처발랐다느니, 한강 이남의 경복궁이라느니, 부석사 무량수전의 살림집 버전이라느니! 과격하고 선정적인 소문들이었다. 금강송을 켜 옻칠한 대문 앞에 서니 얼굴에 잔뜩 웃음을 문 주인이 고무신 발로 뛰어나온다. 신만 고무신이 아니다. 명주 누비 바지저고리에 역시 솜 두고 누빈 조끼를 입었다. 지난해 파주 헤이리의 한 축제에서 그가 추는 선비춤을 구경한 적 있다. 한옥에 한복 입고 살면서 선비춤을 추는 사람. 신명 많고, 입담 좋고, 생각 굳은 이 집 주인 권오춘(61) 국어고전문화원 이사장이다. 그는 지금 전통문화의 르네상스를 위해 앞장서서 달리는 중이다. 소득 3만 달러가 되면 다들 전통정신을 찾을 수밖에 없을 텐데 막상 한옥과 한복과 한식과 전통공예가 다 사라지면 큰일 날 일 아니냐며 자신의 삶으로 철저하게 한국인의 문화를 지키겠노라고 선언한 사람이다. 먼저 집 이야기부터! 초은당이 앉은 곳은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 야트막한 언덕이다. 눈앞에 북한강 줄기가 펼쳐지고 뒤로는 둥두렷한 산이 막아서 있다. 좌우로는 거인의 두 팔인 양 산줄기가 흘러내려와 집터를 포근하게 껴안는 형국이다. 풍수를 모르는 까막눈의 입에서도 ‘배산임수’ ‘좌청룡우백호’ 같은 말이 절로 튀어나올 길지다. 원래 이 집은 문화재 전문위원이기도 한, 홍근옥 명지대 공예과 교수가 박물관을 할 요량으로 맘먹고 지었다고 한다. 도집례(都執禮·의례를 맡아보는 사람)는 봉정사 극락전, 백제문화단지 같은 국보급 문화재를 복원했던 인간문화재 최기영 선생이 맡았다. 그런데 짓는 중에 그만 외환위기가 터졌다. 급히 새 주인을 물색하던 홍 교수와 마땅한 한옥을 찾고 있던 권 이사장이 만났다. “이 집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계약하자고 했어요. 당시 집사람은 미국에 머물던 중이었는데 전화로 상의했더니 한옥에 살겠거든 이혼하자고 하데요. 금방 설득할 일은 아니다 싶어 일단 계약부터 했지요.” 그때가 2004년이었다. 당시 사지 말라던 부인이 이젠 팔지 말라고 한다니, 그의 설득 작업이 효과가 있었던 듯싶다. 그러나 아직 100% 성공은 아니다. 부인은 잠실의 아파트에 살고 양평집엔 사랑주인만 일주일에 삼사 일씩 혼자 내려와 맥반석 구들 위로 군불 때면서 살고 있다. 한옥이 현대 한국인에게, 특히 살림을 맡은 안주인에게 얼마나 천대 받고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현실이다. “한옥에 살면 불편한 줄 알지만 막상 익숙해지면 심신이 아주 편안해져요. 이렇게 과학적이고 인간을 깊이 이해하는 건축양식이 있었던가 새삼 놀랍니다. 남방문화인 마루와 북방문화인 구들이 만난 것도 그렇지만, 창호지·문얼굴·창호의 치수 같은 것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휴머니즘에 입각해 있는지요. 한옥은 우주 철학을 포괄하는 집이에요. 추녀의 원·기둥과 마루와 방 마루의 네모, 지붕의 세모가 합해 원방각(圓方角) 천지인(天地人) 철학을 품고 있습니다. 한복 또한 마찬가지예요. 집과 옷이 우주 원리에 두루 부합해요. 사람도 소우주니 집에 들어앉으면 성품이 활달해질 수밖에! 그러면서 또 언행은 신중하게 만들거든요.” 초은당 지붕은 여느 한옥과는 다르다. 처마가 길게 빠져나와 기와지붕이 내려앉은 모습이 새가 비상하는 형상이되 이건 까막까치 같은 잡새의 날개가 아니다. 적어도 독수리나 봉황쯤은 될 듯하다. “처마가 긴 것은 고려시대 건축양식이랍니다. 남성적이고 우람하지요.” 그 한옥을 그냥 두지 않고 그는 공들여 옻칠을 했다. 그냥 옻칠 정도가 아니라 인간문화재 옻칠장인 정수화씨를 초빙해 기둥엔 아홉 번, 바닥엔 다섯 번씩 덧발랐다. 초은당은 그래서 마루장도 기둥도 빛을 반사하는 거울면이 됐다. “옻칠은 세계에 자랑할 우리 보물입니다. 옻칠을 제대로 하면 불에 타지도 않고 원적외선이라는 것이 엄청나게 나온답니다. 옻나무로 차를 달여 먹으면 조기엔 암도 치료할 수 있대요. 유리컵에 우유를 담아놓으면 하루를 넘기지 못하지만 옻칠한 나무 컵에 우유를 담으면 일주일을 가도 상하지 않는 걸 내 눈으로 봤으니깐요.” 그의 한옥과 한복 예찬은 기운차고 재미있고 격조 있고 끝 간 데를 모른다. 그는 안동권씨 부정공파 35대 손으로 경북 안동에서 나고 자랐다. 태생적으로 선비정신이 몸에 밴 사람이다. 10여 년 전에는 하회 마을 인근 구담 마을에 60칸짜리 ‘구담정사’를 장만해 어머니를 모셨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이곳 양평의 북한강 물길은 안동의 낙동강까지 닿았었다. 배를 타고 그렇게 흘러간 기록이 여기저기 보인다. 지금 여기 양수리 북한강가 초은당 앞을 맴도는 전통문화의 물길이 안동 하회에 이르러 구담정사까지 흘러가기를 그는 꿈꾼다. 초은당은 본채 27칸, 별채 3칸 해서 모두 서른 칸의 집이다. 깔고 앉은 대지는 3300㎡(1000평). 마당 초입에는 들어서는 사람을 향해 절을 하는 형상의 향나무를 심었다. 또 봉화에서 가져온 금강송을 심었고, 마당으로 올라서는 계단은 문경에서 실어나른 목화문석으로 만들었다. 들여다보면 돌 속에 목화 송이가 툭툭 벙근다. 대문 앞엔 한쪽엔 초(招), 다른 쪽엔 은(隱)이라고 새겨진 와당을 박아넣었다. 초은은 숨어있는 사람을 부른다는 의미의 당호이고, 집주인 권오춘의 호다. 한복 입고 한옥에 사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몇 해 전 그는 영남춤의 명인인 박경랑 선생을 모셔와 선비춤을 배웠다. 손이 오면 거울같이 윤나는 대청에서 그는 너울너울 선비춤을 춘다. 지난가을엔 바깥 담을 새로 둘렀다. 거기엔 검은 빛이 감도는 보령 오석을 썼다. “산성을 쌓는 방식으로 담을 쌓았어요. 담장 위에 늘어놓은 흙인형은 인연 깊은 도예가 박종식이 만들어서 구운 겁니다. 인간의 벼라별 동작이 다 담겨 있지요. 봄이 오면 바닥에 조선꽃들을 심을 겁니다. 바닥에 깔린 벽돌도 박종식의 작품입니다. 자세히 들여다보세요.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게 모두 한국 전통 문양을 벽돌 위에 복원한 겁니다.” 지면이 모자라 그의 한국문화 사랑을 일일이 기록하지 못함이 아쉬울 뿐이다. 글=김서령 칼럼니스트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 중앙일보 기사원문보기
    • 국악정보
    • 국악인소식
    2012-08-28
  • 박경랑의 코리언 팝 클래식 댄스 - 배학수교수의 무용평론
    --> 박경랑과 e-춤터 다음카페 가기 [예술부산 통권 78호 2011년 12월 35쪽] 1981년 테네 가수 플라시도 도밍고는 대중 가수 존 덴버와 함께 아마도 사랑’(Perhaps Love)을 불렀다. “아마도 사랑은 폭풍우로보터 안식을 주는 쉼터와 같을 거예요.” 대중음악과 고전음악을 섞을 때 잘 못하면 둘의 결점만 모여 유치하면서도 지루한 작품이 되어버리는데 도밍고와 덴버는 둘의 장점을 살려 편하면서도 품위있는 노래를 만들었다. 그날 박경랑도 그랬다. 그녀는 한국의 고전무용에 대중 무용적 요소를 잘 섞어 전통미를 간직하면서도 즐거운 작품을 만들었던 것이다. 박경랑은 춤을 세 개 보여 주었는데 고전과 대중의 화학적 결합을 성취한 작품은 두 번째 작품 ‘교방청 춤’이었다. 이 작품은 굴신(屈伸)과 상허하실(上虛下實)이란 한국 고전 무용의 전통적 기법을 그대로 사용한다. 굴신이란 몸을 굽혔다 펴는 업-다운이며, 상허하실이란 단전호흡으로 하체를 안정시키며 상체를 자유롭게 움직이는 자세이다. 교방청춤은 모든 동작을 고전적 방식으로 수행하면서, 고전무용에서는 드문 직선의 활달함과 세밀한 잔놀음, 그리고 강력한 클라이맥스를 섞어 관객에게 새로운 감흥을 주었다. 양팔을 일직선으로 죽 펴는 직선의 사위는 매우 시원한 느낌을 주며, 작은 장식적 움직임이 동작에 자주 가미되어 전체적으로 화려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절정의 장면은 박경랑 교방청춤의 가장 큰 특징이다. 작품의 종반 그녀는 지구가 태양을 돌듯이 자전하면서 공전한다. 느린 속도로 진행을 하다가 빠른 속도로 자전과 공전을 섞으면 그 동작의 박력과 순환이 주는 아름다움 때문에 관객들은 삭이고 있던 감정을 터트리면서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된다. 박경랑은 교방청 춤에서 고전무용의 중후함에 시원함과 화려함, 그리고 절정의 회전을 섞어 고전과 대중의 중간이란 새로운 스타일의 무용 세계를 확립하였다. 이날 함께 출연한 이생강과 백인영도 많은 박수를 받았다. 이생강은 소금, 피리, 대금을 들고 나와 각각의 음색을 소개하였으며 목포의 눈물과 대니보이를 그 악기로 연주하였고, 백인영은 아쟁으로 베사메무초를 연주했다. 그렇게함으로써 그 두 분은 국악기로 서양음악을 연주하면 완전히 새로운 분위기가 난다는 점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양악 연주에 시간을 너무 많이 할애하여 국악 작품을 제대로 듣고 싶은 관객은 다소 실망이었을 것이다. 파페라(popera)는 대중음악(pop)의 형식으로 연주하는 오페라이거나 오페라 형식으로 연주하는 팝이다. 박경랑의 춤은 대중 무용 형식으로 추는 고전무용이다. 클래식과 대중음악에 대해 어느 쪽이 더 좋은지 말할 수 없듯이, 박경랑의 팝 클래식도 정통 고전무용보다 수준이 떨어진다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하나의 독자적 스타일인 것이다. (2011.11.11. 부산 국립국악원 연악당) --> 경성대학교 배학수교수 네이버블로그
    • 국악정보
    • 국악인소식
    2012-08-28
  • 동래학춤 '유금선' 스토리텔링전, 12월 17일 서울 '한국문화의집'서 공연
    -->공연정보 자세히 보기 마지막 동래 기생, 손님들 1시간 놀아도 100시간…나는 마지막 동래 기생 … 팔십 평생 목 쉬어 본 적 없었데이 “장구고 뭐고 나는 선생에게 악기를 배워본 역사가 없다.” 부산시 무형문화재 3호 동래학춤 구음 예능보유자 유금선 할머니는 타고난 예인이다. 연습 도중 가요 반주 나올 타이밍이 되자 피리를 불거나 기타를 연주하는 시늉까지 냈다. 장구만 칠 줄 아는 구닥다리 할머니가 아니란다. 드럼·기타 솜씨도 수준급인 만능 엔터테이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우리 전통음악에 구음(口音)이란 분야가 있다. 입소리로 악기를 흉내 내던 것이 그 자체로 춤판의 반주음악이 된 것이다. 재즈로 치면 스캣이요, 힙합으로 치면 ‘북치기 박치기’, 보통 사람들 노래판에선 ‘쿵짜작 쿵짝’이랄까. 구음의 최고봉이 부산시 무형문화재 3호 동래학춤의 구음 보유자인 유금선(80)씨다. 그는 장구 하나 들고 앉아 목소리 하나로 아쟁·대금 가릴 것 없이 전통악기란 악기 소리를 죄다 불러낸다. 악보는 없다. 춤에 맞추어, 분위기에 맞추어 그때그때 다른 소리를 낸다. 춤이 소리를 부르기도 하지만, 소리가 춤을 부르기도 한다. ‘되놈 송장도 일어나게 한다’는 소리다. 구음은 즉흥이다. 정해진 MR(반주음악)에 맞추어 노래하는 요즘 가수들이 닿을 턱이 없는 경지다. 허나, 구음의 달인 역시 그저 동래학춤의 반주 할머니 정도로 숨어 있었다. 그가 여든 평생 처음 ‘유금선’ 이름 석 자를 앞세워 서울 무대에 선다.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사장 이세섭)이 서울 삼성동 한국문화의집 (KOUS· 02-3011-1720) 에서 17일 오후 4시 올리는 ‘무형문화재 스토리텔링전’의 제 1회 공연의 주인공이 바로 마지막 동래 기생 유금선과 그의 후배들이다. 지정 종목만으로 알려진 장인들의 숨겨진 재능을 보여주고, 전통 공연판 입담의 최고봉 진옥섭 감독이 예인의 인생까지 들려주는 전석 1만 원 ‘만원의 행복’ 공연이다. 유씨는 ‘구음’으로 재주를 인정받았지만, 그 하나로 그의 삶을 설명하기에 부족하다. 동래는 예부터 뛰어난 기생을 배출했다. 사신을 접대하는 외교적 목적의 관기를 내었으니 교방(敎坊) 교율은 엄격했다. 교방은 관기 제도가 철폐된 1910년 ‘동래기생조합’, 1920년 일본식 ‘권번(券番)’으로 이름을 바꾼다. 그 시절 유금선의 집은 동래 권번에 이웃해 있었다. “가시나라꼬 소학교도 댕기다 치웠지. 담장 너머로 권번 여자들이 예쁜 옷 입고 인력거 딱 타고 가는 거 보이 그래 좋고 부러운 기라.” 그는 열다섯에 권번에 입소해 소리를 배워 3년 만에 졸업장을 받고, 화초머리(기생의 성인식)를 얹었다. 유씨는 김강남월·원옥화·김계월과 함께 날리는 4인방이었다. 인기가 좋아 1시간을 놀아도 손님들은 100시간, 200시간 놀았다고 전표를 끊어줬다. 하지만 스물둘에 난 전쟁은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전쟁통에 피난민이 몰려든 부산으로 각지 예기들도 몰려들었다. 동래 권번은 ‘국악원’이란 점잖은 이름으로 바뀌었다. 온천장의 풍류는 소리가 아니라 가요판으로 변했다. 소리를 한다고 누구나 가요도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전천후였다. “딱 한 번 들으면 입력이 되는 기라. 한 번 듣고 곡 외우고, 두 번 듣고 가사를 외웠데이. 인제 대가리 돌만 들었는가, 뇌가 죽어삤는 갑다.” 17일 무대에는 김명초(66)·서화자(63) 등 60년대에 날리던 동래 국악원 후배들도 함께 선다. 그들 역시 소리, 민요, 가요까지 커버해 온 집안식구를 먹여 살렸던 만능 예능인이다. 60년대 동래 예인들에게도 ‘건전 민요’가 있었으니, 바로 ‘재건가’다. 민요조지만 ‘살기 좋은 동래 온천(…)이 사업을 받들어서 제일 관광 이룩하여 천수만대 보존하세~’란 가사는 건전가요 뺨친다. ‘재건가’를 기억하는 이는 진짜 동래 기생이지만, 모르면 가짜배기란다. 진짜배기들이 함께 외출(야외놀이)이라도 나가면 돈을 갈퀴로 쓸어 담았다. “팁이 말도 몬 해요. 나중엔 돈이 얼마나 꼽히는지 돼지 입이 째질라 캐. 그때가 재미있었지.” 그렇게 긁어 모은 돈은 다 날리고 없다. 빚만 남기고 젊은 나이에 죽은 서방님 때문에 한번 망했고, 다시 뛰어 모은 돈으로 장안 최고의 요릿집을 차렸다가 복어 독에 손님이 죽는 사고로 또 한 번 망했다. 남자 속에서 살았지만 50년간 독수공방 신세다. 지금이야 예능인이 각광받는 시대라지만, 그 시절엔 기생이란 이름 말고는 여인이 재능을 펼칠 길이 없었다. 몇몇 후배는 이름을 감추고 가정을 꾸렸다. 8일 동래국악진흥협회에 모인 왕년의 멤버들은 ‘정선 아리랑’부터 ‘재건가’ ‘여자의 일생’ 등의 유행가까지 부르며 호흡을 맞췄다. 40여 년 만에 다시 뭉친 이들의 흥은 쿠바의 노익장 밴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부럽지 않았다. 무얼 잘못 먹어 지난 밤 토사곽란으로 잠을 설쳤다는 주인공은 연습 초반엔 굳은 표정이더니 나중엔 다리로 기타 치는 흉내까지 내며 놀았다. “바다에 뛰어 내릴라꼬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재미있게 살기는 살았지. 내 청춘하고 모든 것이 구음에서 다 흘러 나오는 거라. 경상도는 억양 땜에 소리꾼이 안 나와요. 그래도 내 억양은 그런대로 들어줄 만하다 카네. 목이 쉬어본 적이 없으이 그건 좀 타고났는가배. 다시 태어나면 내 대명창이 한번 되고 싶다꼬.” 부산=이경희 기자 --> 동아일보 원문보기
    • 국악정보
    • 국악인소식
    2012-08-28
  • 비운의 천재 무용가 최승희, 감춰진 동영상 나왔다
    --> 최승희 동영상 2분 20초 보기 젊은 날, 한반도와일본열도 그리고 유럽까지 매혹시켰던 뇌쇄적인 자태는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동영상 속의 그녀는 40대 나이가 무색하게 우아한 춤사위를 선보이고 있다. 비운의 천재 무용가 최승희(1911~1969)의 미공개 무용 동영상과 무용음악곡이 국내에 처음 공개됐다. 신나라레코드(회장 김기순)는 최승희 탄생 100주년(2011년 11월24일)을 맞아 그의 무용 동영상·음악 등을 담은 DVD와 CD 출간을 앞두고 미공개 자료를 본지에 공개했다. DVD에는 최승희의 장구춤 독무와 부채춤 군무를 포함해 자신이 안무를 맡은 무용 동영상 4편이, CD 3장에는 최승희가 직접 작곡한 무용음악 등이 실렸다. 그동안 국내에 소개된 최승희 관련 자료들은 주로 그가 1946년 월북하기 이전의 것이었다. 김연갑 한민족아리랑연합회 이사는 "이번 자료는 최승희가 월북한 이후 숨지기 전까지 생애 후반기의 예술 세계와 활동상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 조선일보 원문기사 자세히 보기
    • 국악정보
    • 국악인소식
    2012-08-26
  • '제19차유엔관광기구총회' 만찬장의 송소희
    --> 송소희 홈페이지 【경주=뉴시스】이승표 기자 = 국악신동 송소희양이 2011년 10월 11일 오후 경주힐튼호텔 선재미술관에서 열린 '제19차유엔관광기구총회'의 수석대표 만찬장에서 우리민요 열창하고 있다. --> 기사 원문보기
    • 국악정보
    • 국악인소식
    2012-08-26
  • ‘국악계의 김연아’ 22세 소리꾼 김나니를 아시나요?
    도포자락을 휘날리거나 곱게 쪽진 머리에 한복을 입고 구성진 소리 한마당을 풀어내는 소리꾼들의 무대, 최근에 몇 번이나 본적이 있는가. 우리 전통음악인 국악은 서양음악을 포함한 대중가요에 밀려 ‘서자’ 취급을 받은 지 오래다. 특히 젊은 사람들은 ‘국악=재미없는 것’이라는 공식으로 우리음악과 목소리를 외면하기 일쑤다. 하지만 여기 눈길을 끄는 한 소리꾼이 있다. 22살, 아직 어리고 앳된 나이지만 ‘국악=재미있는 것’이라는 공식을 알리기에 충분한 재주 뿐 아니라 아이돌 가수 못지않은 미색까지 갖췄다. 그야말로 ‘국악계의 김연아’, 또는 ‘국악계의 아이돌’이라는 별칭이 제격인 소리꾼 김나니를 양재동의 한 연습실에서 만났다. ●“어르신들이 예뻐해 주시니, 그 칭찬에 판소리 가락을 뽑아냈죠.”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에서 음악과 판소리를 전공하고 대학원 진학을 앞둔 김나니는 현재 전통음악과 현대음악을 접목한 퓨전장르를 선보이는 에스닉 팝그룹 ‘프로젝트 락’의 막내이자 보컬로 활동하고 있다. ▶김나니 프로필 --> 기사 원문보기
    • 국악정보
    • 국악인소식
    2012-08-26
  • 정영만 남해안별신굿 예능보유자
    --> 남해안별신굿 다음카페 바로가기 정영만은 1956년 경남 통영의 무속집안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점 찍혀진 듯 신청(무당에게 법도와 예술을 가르치는 곳)으로 보내져 여덟 살 때부터 굿판에서 피리를 불렀다. 유년시절 집안 어른들을 따라 굿판, 요정 등을 다니며 김소희, 이매방, 조상현 등 다양한 명인들을 만났고 그들로부터 어리지만 야무진 피리실력을 인정받는다. 그러나 어린 소년에겐 피리로 얻는 명성보다는 피리 부는 새끼무당이라는 현실이 더 큰 상처고 고민이었다. 그는 생계를 위해, 그리고 무당집 그림자를 조금이나마 지우기 위해 낮에는 공장에서 밤에는 요정에서 피리를 불며 청년기를 보냈다. 병역을 마친 후에는 택시 기사라는 번듯한 직업까지 갖는 듯 했으나 마음 안쪽에서 끊임없이 올라오는 굿 가락에 피리를 들고 다시 발을 들인다. 결국 왕고모 정모련(남해한 별신굿 최고의 무녀)의 설득으로 다시 피리와 징을 잡게 되어 중요무형문화재 제82-라호 남해안 별신굿 보유자가 된다. 결국 이는 11대를 이어온 무당집에서 태어난 그의 정해진 운명 이자 ‘숙명’이었다. --> 자료출처 - playdb.co.kr
    • 국악정보
    • 국악인소식
    2012-08-24
  • 영남춤의 맥을 이어가는 춤꾼 박경랑
    --> 박경랑과 e-춤터 다음카페 바로가기 40년 춤사위 춤을 의식 안 하니 진짜 춤이 나오더라!고성 오광대 초대 무형문화재 고 김창후 선생의 외증손녀말 배우기 전부터 춤 보고 자라 대학 때는 발레 전공 춤꾼 박경랑(50)씨의 춤사위를 처음 본 것은 2년 전 서울시 중구 필동 남산 자락에 자리 잡은 서울남산국악당에서 열린 한 공연에서였다. 박씨는 영남지방 기생의 춤, 영남교방청(敎坊廳)춤을 췄다. 느린 장구 장단에 맞춰 상체가 미묘하게 흔들리다가도 장구의 장단이 점차 빨라지면 박씨의 발놀림도 장단을 뒤따랐다. 춤을 추는 박씨의 손끝에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신명이 묻어나왔다. 쉴 새 없이 달리던 장구 장단이 갑자기 멎자 박씨가 무대 한편으로 다가갔다. 무대의 왼편엔 도포를 입은 한 시인이 자신 앞에 놓인 화선지에 시를 쓰며 풍류를 읊고 있었다. 박씨는 허리에 둘러맸던 치맛자락을 넓게 펼쳐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시인 앞 화선지 위에 놓았다. 시인은 먹을 듬뿍 묻힌 붓을 들어 박씨의 파란색 비단 치맛자락 위에 시 한 줄을 적었다. 오래전 교방에서의 풍류도를 그대로 무대 위에 옮긴 공연이었다. 공연을 본 한 관객은 “굉장히 여성적인 춤이었다”고 말했고, 한국을 관광 중이던 한 미국인은 “섹시한 무대였다”고 말했다.지난 5월 26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박경랑 영남춤문화예술연구소’ 연습실에서 중견 춤꾼 박경랑씨를 만났다. 박씨는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부산과 경남 김해에서 무용 강의를 하고 서울에 올라온 직후였다. 체중이 50㎏도 되지 않는 작은 체구의 그는 국악인 특유의 거친 목소리로 “날도 더운데 여기(연습실)에선 사진만 찍고 밖에 나가서 시원한 맥주나 한잔 하자”고 말했다. 교방청춤이 우리 춤의 기본박씨는 국내 무용계에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경남 고성 출신의 그는 중요무형문화재 제7호 고성 오광대의 초대 예능 보유자인 고 김창후 선생의 외증손녀다. 박씨는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21호 김수악류 진주교방굿거리 춤 이수자이자 고성오광대(固城五廣大) 전수자이기도 하다. “제가 언제부터 춤을 췄는지는 별로 의미가 없어요. 어릴 적에 외가에 놀러갈 때마다 외증조할아버지가 하시는 손짓, 발짓을 자연스럽게 따라하면서 움직임을 익힌 것이니까요. 자라면서 그냥 (춤을) 추고 싶었어요.”박씨는 어릴 적 외증조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박씨는 “할아버지는 지금은 음식점이 된 부산의 동래권번(券番·조선시대에 기생을 총괄하던 기생청의 후신)에 자주 드나드시면서 풍류를 익히셨다”며 “할아버지의 예인으로서의 끼가 저한테 남겨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 외증조할아버지를 따라 박씨도 어릴 적부터 춤과 노래를 좋아하고 즐겼다. 동네에 약장수가 와서 창도 하고 춤도 추고 묘기도 부릴 때면 넋을 잃고 바라봤다. “저희 아버지 어머니는 춤과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시고 우리 5남매 가운데 춤을 추는 사람도 저 하나뿐이에요.”박씨가 추는 영남교방청춤은 김창후 선생과 그의 제자 고 조용배 선생을 통해 전수됐다. 교방청춤은 교방청(고려·조선 시대 기생들을 중심으로 춤과 노래를 관장하던 기관)이 폐지된 후 지방으로 흩어졌던 관기들이 권번을 중심으로 췄다. 활달한 상체 동작과 섬세한 발놀림이 특징이다. 박씨는 이어서 “기생들의 춤인 교방청춤은 우리 춤의 기본”이라며 “기생 문화가 조선 이후에 음주 문화와 결합하며 퇴폐적인 이미지로 변했는데 원래 교방청은 예인 육성 관청으로 우리의 춤 문화는 교방에서 많이 가다듬어졌다”고 말했다.진정한 춤은 뭘까지금은 영남지방의 춤으로 유명한 박씨지만 대학에선 발레를 공부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발레를 시작해 세종대에서 발레를 전공했다. 하지만 무릎과 팔 관절이 발레를 하기엔 적합한 체격이 아니었다. “제 아버지도 제가 평생 발레를 하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힘든 무용은 그만하고 결혼해서 평범하게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길 바라셨죠.”박씨의 생각은 달랐다. 29세에 첫아이를 낳고 한국 전통춤에 몰입했다. 아이를 등에 업고 다니며 동래권번의 마지막 춤 선생이었던 강옥남 선생에게서 교방청춤을 배웠다. 주변에서 “독하다”는 소리도 들었다. 박씨는 “그땐 ‘지금이 아니면 영영 춤을 출 수 없다’고 생각했다”며 “제가 어릴 적부터 춰오던 춤을 완성하고 싶기도 했다”고 말했다. 오로지 춤에만 매달려 지금까지 달려온 그에게도 슬럼프가 있었을지 궁금했다. “지금까지 춤을 그만둔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슬럼프는 간혹 찾아왔습니다. 특히 ‘내가 지금 왜 춤을 추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지난해 말 박경랑씨의 춤 인생에 한 번의 위기가 찾아왔다. 50세를 넘긴 해부터 체력이 예전과 같지 않았고 ‘지금 내가 추는 게 진정한 춤일까’ 의문도 들었다. 6개월 정도 이어진 정신적 슬럼프였다. 그런 박씨에게 지난 3월 우연한 기회가 찾아왔다. “일본의 소아마비 환자, 정신지체인 등 몸이 조금 불편한 사람들이 모여 만든 극단 타이핸에서 갑작스럽게 연락이 왔어요.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은 한국의 근대무용가 최승희 역을 맡아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재일 동포 2세인 김말리 극단 타이핸 대표가 조선의 기생이었던 자신의 어머니와 재야의 독립운동가 함웅도의 사랑 이야기를 모티프로 만든 창작극 ‘함웅도 잠복기’란 작품이었다. “이제야 춤을 알겠다” “작품 속에 팔다리가 불편한 소아마비 무용수들이 자신의 느낌만으로 살풀이를 추는 장면이 있어요. 그런데 그들의 움직임이 사지 멀쩡한 제가 추는 춤보다 훨씬 아름답다는 것을 느끼곤 충격을 받았죠. 그때까지 장애인에 대해 가지고 있던 편견이 깨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제가 표현하지 못하는 걸 그들은 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거다’란 생각이 들었죠.”박씨는 이 극단과의 공연을 준비하며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정신적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박씨는 “서로 표현하는 형태미는 달라도 ‘공감’을 통해 같은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다”며 “이 작품에 무용의 요소를 좀 더 가미해 오는 9월 공연으로 선보일 예정”이라고 말했다.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이른 박경랑씨는 새 작품을 구상하고 있다. 박씨는 “시간 날 때마다 새로 나온 국악과 클래식 등 다양한 음악을 들으면서 작품을 생각한다”며 “할 줄 아는 게 춤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런 그에게 춤은 가장 쉬운 일처럼 보였다. 그러나 박씨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춤을 추기 시작한 지는 40년이 넘었고 한국무용만 추기 시작한 지는 20년이 넘었지만 이제야 춤추는 느낌을 조금 알겠어요.” 40여년간 춤을 춰온 그에게서 예상치 못한 대답이 나왔다. 매일 8시간 정도 다른 사람들에게 한국무용을 가르치고 남는 시간에 틈틈이 자신의 춤을 춰온 ‘연습벌레’로 알려진 그였다. 박씨는 “그전까진 여전히 내 몸동작과 음악을 의식하는 춤을 추고 있었다”며 “2년 전부터야 내 몸이 내 맘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젠 음악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춤이 나오고 음악이 멈추면 자연스럽게 몸이 멈춰 “춤출 맛 난다”는 박씨는 “제 인생의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했다.--> 주간조선 인터뷰 기사원문 보기
    • 국악정보
    • 국악인소식
    2012-08-24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