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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9회 춘향국악대전 명창부 대통령상에 김미숙씨
    제39회 춘향국악대전 판소리 명창부에서 김미숙(43·대전 광역시)씨가 대통령상을 차지했다. 김씨는 4월 28일 춘향제 행사의 하나로 남원시 춘향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판소리 명창 부분에서 심청가 중 '심봉사가 타루비 옆에서 비는 대목'을 불러 평균 99점을 받아 명창의 반열에 올랐다. 명창대회 열 번째 도전 끝에 명창이 된 김씨는 이일주·조통달 명창과 전북도 문화재인 민소완 선생으로부터 사사했다. 광주예술고, 전북대 한국음악과, 목원대 음악대학원을 나온 김씨는 전주대사습놀이 학생부 판소리 장원, 종로 국악경연대회 국무총리상 등을 수상했다. --> 연합뉴스 해당기사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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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29
  • 전남대 전인삼 교수 4월27일 '82회 춘향제'서 '동편제 춘향가 복원발표'
    "'동편제 춘향가' 복원 위해 4년을 매달렸어요" "동편제 판소리 5바탕중 '흥부가'와 '수궁가', '적벽가'는 전승이 활발한 반면에 '춘향가'와 '심청가'는 안타깝게 전승이 단절돼 왔는데 복원에 매달린 지 4년만에 동편제 춘향가를 발표를 하게 돼 감회가 새롭습니다."춘향제전위원회 주최와 전남대 소리문화연구소 주관으로 열리는 '제82회 춘향제'(4.27~5.1)에서 동편제 춘향가 복원발표회를 갖는 전인삼 교수(판소리ㆍ전남대 국악과)는 소감을 이처럼 밝혔다. "대학에서 제자들을 양성하는 틈틈이 복원에 매달렸다"는 전 교수는 "동편제 춘향가는 시조인 송흥록을 비롯해 송광록, 송우룡, 송만갑, 박봉술 명창으로 이어졌다"면서 "1971년 박봉술 명창(1922∼1989)이 녹음만 남겨놓았지만 제자양성이 전혀 안되는 바람에 전승이 끊어졌다"고 말했다.특히 전 교수는 "남원지역에 전승되는 '열녀춘향수절가'와 박봉술 명창의 춘향가는 거의 유사한 특징을 갖고 있는 데 완벽하다고는 말을 못하지만 소신있게 복원하는 데 주력했다"고 강조했다.--> 광남일보 해당기사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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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29
  • 이매방 vs 정명숙 무형문화재 지정 법정공방
    --> MBN뉴스 보기 [단독]'이매방 vs 정명숙' 무형문화재 법적공방 【 앵커멘트 】 한국 무용계의 1, 2인자로 불리는 이매방·정명숙 씨가 법적공방을 벌이고 있습니다. 살풀이춤 무형문화재 지정을 둔 진실싸움입니다. 어떤 내용인지, 이해완 기자가 단독 보도합니다. 【 기자 】올해 여든다섯인 한국 무용계의 거장 이매방 씨는 승무와 살풀이춤 무형문화재입니다. 살풀이춤 2인자, 즉 '무형문화재 전수교육조교'는 일흔일곱인 정명숙 씨. 이매방 씨에 이어 정명숙 씨가 무형문화재 지위를 이어받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이 씨가 정 씨의 후보자 지위가 날조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추천서를 1991년 당시 문화재관리국에 내면서 임의로 서류를 작성했고, 자신의 도장도 위조했다는 겁니다. ▶ 인터뷰 : 이매방 / 승무·살풀이춤 무형문화재 보유자 - "만분의 일의 내 춤 가락을 (자신의 춤에) 넣었다면 덜 억울해. 자기 마음대로 만들어서 다른 사람한테는 '이매방의 춤이다'라고 말하는데 그게 말하자면 사기 치는 거지." 이매방 씨는 정명숙 씨의 후보 지위를 박탈해 달라며 서울행정법원에 소장을 제출했습니다. 하지만, 정 씨는 이 씨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했습니다. 정 씨는 자신이 추천서를 제출한 적이 없으며,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추천서를 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 인터뷰 : 정명숙 / 살풀이춤 전수교육조교 - "어떻게 하늘 같은 선생님을, 존경하는 선생님의 도장을….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예요. 거짓말 탐지기 놓고 하면 돼요." 사사한 기간을 두고도 이매방 씨는 다섯 달, 정명숙 씨는 25년이 넘는다고 각각 달리 주장하고 있습니다. ▶ 스탠딩 : 이해완 / 기자 - "스승과 제자의 얽히고설킨 실타래가 어떻게 풀릴지 한국 무용계가 주목하고 있습니다. MBN뉴스 이해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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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29
  • [謹弔] 한국 무용평론 1세대 정순영 씨 별세
    한국 무용평론계의 큰 별이 졌다. 한국 무용평론 1세대를 대표한 무용평론가 정순영(鄭淳永) 전 경성대 명예교수가 2012년 1월 21일 오후 4시 30분 지병으로 향년 85세를 마감했다. 고 정순영 선생은 1928년 전남 광주 태생으로 서울대 공과대학을 졸업했다. 정 선생은 광복 직후 대학생 신분으로 함귀봉 조선교육무용연구소에 입문해 조동화 최창봉 차범석 정병호 김문숙 등과 함께 현대무용과 교육무용을 체득했다. 이후 부산대⋅경성대에 재직하고 은퇴한 후에는 대구시민문화연구소를 열어 지역의 춤 운동을 전개했다. 선생은 무용대본, 연출, 무용평론가로 활동하고 한국춤평론가회 정회원, 대구시민문화연구소장을 지냈다. 또 신문과 월간 ‘춤’ 등에 평문을 기고하며 작고하기 전까지 현장평론가로서 활약했다. 저서로는 ‘춤추는 바보, 춤 못 추는 바보’ 등 5권의 무용평론집이 있다. 유족으로는 대구시립무용단 초대 단장을 지낸 현대무용가인 부인 김기전(77세) 씨와 사업을 하는 장남 기준(53세), 기호(43세) 씨 등이 있다. 빈소는 경북대병원 장례식장 207호실이며, 발인은 25일 오전 7시에 진행된다. 장지는 광주광역시 선산. 박선혜 기자 --> 뉴스천지 기사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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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29
  • 퓨전국악그룹 - 아리아
    요즘 공연계의 새로운 트렌드 가운데 하나는 퓨전 국악 그룹 러시다. 국악을 전공한 국악인들이 비좁은 국악 공연계를 나와 보다 넓은 영역에서 활동하기 위해 퓨전 국악 그룹을 결성하고 있는 것. 이미 몇몇 국악 퓨전 그룹들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가운데 해외 진출을 목적으로 결성된 퓨전 국악 그룹 아리아가 눈길을 끌고 있다. “처음엔 국악이 재미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멤버들이 모두 빼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는데다 그 소리와 가락이 묘한 매력을 갖고 있더라고요. 요즘엔 아예 조금씩 배우기 시작했는데 점점 국악에 더 빠져들고 있는 중이에요.” 유일하게 국악 전공자가 아닌 건반의 전지은이 말하는 퓨전 국악의 매력이다. 재즈 피아니스트로 세계대백제전 공주 수상공연에선 음악 조감독으로 활동했던 전지은은 퓨전 국악이 충분히 세계무대에서 통할 것이라 말한다. 대금과 건반, 해금과 첼로 등의 합주가 묘한 조화를 이룬다는 것. 특히 구슬픈 소리를 가진 해금은 외국 현악기에선 전혀 찾을 수 없는 소리라고. 아리아는 대금, 해금, 가야금에 건반을 더한 뒤 소리를 입힌 음악을 들려준다. 아리아의 데뷔 앨범에는 모두 네 곡이 수록돼 있다. 우선 국악기로 편성된 발라드 곡 ‘한숨은 바람되어’가 타이틀곡이고 전통 민요인 ‘사랑가’와 ‘뱃노래’가 국악기와 신디사이저가 어우러진 퓨전 곡으로 실려 있다. 또한 해외 공연을 위한 ‘어메이징 그레이스’가 연주곡으로 수록돼 있다. “아직 정식으로 앨범을 출시하진 않았고 음원만 공개했는데 반응이 뜨거워요. 네이버 앨범 인기도 순위가 음원을 공개한 지 한 달도 안 돼 34%나 올랐거든요. 캐롤 메들리 음원 같은 경우엔 크리스마스 때 캐롤 차트에서 7위에 올랐을 정도예요. 해외 팬들의 반응도 뜨거운데 해외 블로거들이 우리 음원을 퍼가서 극찬과 함께 올려놓은 걸 볼 때마다 정말 기뻐요.” 아리아는 애초부터 해외 활동을 위해 결성한 그룹이다. 이른바 국악 한류를 위해 결성된 팀인 만큼 오디션 과정부터 경쟁이 뜨거웠다. 그렇게 뽑힌 국악인 네 명은 모두 쟁쟁한 실력파다. 소리를 맡고 있는 송지현은 경기명창 이호연의 사사를 받은 경기민요 소리 57호 전수자이며, 대금의 이모아는 한예종 논술(전통원 논술 필독서)의 저자다. 또한 해금의 김세아는 G20 정상회담 개최 기념공연에 섰고 가야금의 신송이는 중앙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출신이다. 이들은 모두 10년 이상 개별 활동을 해왔고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해외 무대에 선 경험도 많은 이들이 해외 진출을 위해 아리아라는 그룹의 일원으로 모인 결정적인 까닭은 좀 더 좋은 국악 공연을 전세계에 알리기 위해서다. “해외 공연을 가면 국악인 역시 연예인으로 대접해줘요. 공연을 듣는 동안 진심으로 마음이 느껴지고 정말 뜨거운 박수 갈채를 보내주죠. 공연이 끝나면 사인과 사진 요청도 쇄도하고. 특히 일본은 전통음악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없어 한국에서 국악을 전공하는 고교생이나 대학생들을 부러워해요. 그들에게 진정한 국악의 매력을 보여줄 수 있는 그룹이 되고 싶어요.” 일요신문 글=신민섭 기자 사진=전영기 기자 --> 기사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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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29
  • 영남교방청춤 박경랑 - 광주MBC '신얼씨구학당’ 출연 동영상보기
    자료 출처 : 광주 MBC 아래를 클릭하시면 광주MBC로 이동되구요... 목록 중.. [2007년 12월 16일] 에서 [동영상]을 클릭하면 별도 회원 가입 없이 보실 수 있습니다.. --> 가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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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29
  •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에 홍성덕씨 선출
    --> 국악협회 홈페이지 바로가기 홍성덕(67) 한국여성국극예술협회 전 이사장이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으로 뽑혔다. 2012년 1월30일 서울 한국의집에서 열린 사단법인 한국국악협회 이사장 선거에서 새 이사장으로 선출됐다. 지난 50여년간 국내외에서 150회에 가까운 무대를 펼친 홍 신임 이사장은 전주대사습놀이보존회 이사장 등을 지냈다. 1993년 한국국악협회 국악대상, 1996년 문화의날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홍 이사장은 "국악인에 의한 국악협회 운영"을 강조하면서 "국악인의 일자리 창출과 공연기회 확대, 국악의 현대화와 세계화에 힘쓰겠다"고 밝혔다. 홍 이사장은 1960년 이래 강도근 홍정택 오정숙 등의 국악인을 사사했다. 【서울=뉴시스】 이예슬 기자 --> 기사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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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29
  • 2011 KBS 국악 대상에 해금연주자 변종혁씨
    --> 임이조 서울시무용단장 ‘2011 KBS 국악대상’ 무용상 수상 KBS는 2011년 'KBS 국악대상'의 대상 수상자로 해금 연주자인 변종혁 추계예대 교육대학원 겸임교수를 선정했다고 12월 12일 밝혔다. 가악상은 강권순, 작곡상 박경훈, 민요상 고금성, 판소리상 전인삼, 연주(현악)상 이슬기, 연주(단체)상은 노름마치, 특별 공로상은 성우향이 받았다. 이와 함께 올해 신설된 무용상은 임이조 서울시무용단장에게 돌아갔다. 시상식은12월 31일 낮 12시10분부터 KBS 1TV를 통해 방송될 예정이다. --> 매일경제 기사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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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29
  • 제주에 터잡은 채상소고춤 김운태 명인
    채상소고춤 --> 다음카페 바로가기 "전통무대공연 개발..공연예술인 키우겠다" "앞으로 제주도는 물론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전통무대공연을 개발하고 싶습니다. 제주는 전통예술부흥은 물론 공연예술인을 키우는 메카가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 동영상 뉴스보기 전립(모자)에 흰 띠를 달아 돌리면서 추는 채상소고춤의 명인 김운태(48)씨가 9일 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 제주민속촌박물관 공연장에서 나긋한 춤동작을 시작하자 관객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호남·영남·경기의 독특한 장단과 함께 다양한 춤사위가 흘러나왔고, 엇박으로 띠를 빠르게 돌리며 기예에 가까운 동작을 선보일 때마다 관객들은 신이 나 저절로 어깨를 들썩였다. 소고춤을 통합한 젊은 예인으로 이름난 그는 벌써 2년 넘게 제주도에 머물며 하루에 세 차례 공연을 하고 있다. 제주의 전문예술공연단체인 '전통노리안 마로'와 함께 '전통예술흥행프로젝트-명인'의 예술감독을 맡은 김씨는 지난 1일 이정희(김숙자류 매헌춤보존회 회장)의 도살풀이춤을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이날 역시 19일 있을 국립국악원 공연을 앞두고 예기(藝妓)인 장금도(83.여) 명인의 민살풀이춤에 고수로 나서 호흡을 맞추는 중이었다. 2009년 두달만 머물고자 제주에 내려온 그는 퓨전 열풍에 밀려 외면받고 있는 전통예술을 부흥하기 위해 마로의 젊은 예인들과 함께 제주도에 남은 인생을 걸어 보기로 의기투합했다. 공연장과 가까운 곳에 민박집을 통째로 빌려 먹고 자며 관객과 예술가 모두 감동과 흥을 누릴 수 있는 무대를 연구하고 있다. 지천명(知天命)을 앞둔 그에겐 아침저녁으로 운동하며 체력관리를 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일과다. "서울에는 예술가가 예술만 하고 살기가 힘들지만 제주도는 다릅니다. 국내외에서 찾아오는 관광객이 늘 있기 때문에 관객을 확보하기 쉽고, 옛날 예인들처럼 살 수 있어 문화 자체가 상품이 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죠." 삶이 춤에 녹아내려 자연스럽게 몸에 배야 한다고 믿는 그에게 삶 자체가 예술이 될 수 있는 제주는 그야말로 '황금밭'이었던 셈이다. 예술의 기운이 샘솟는 천혜의 자연조건에서 작품을 잘 만들고 사람을 잘 키우면 일본의 가부키를 능가하는 문화상품을 만들 수 있다는 그는 2013년께 제주시내권에 전용극장을 만들기 위해 준비 중이다. 이곳에서 제주도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민속예술작품을 상시공연하고 나아가 정재(궁중무용) 등 궁중예술도 볼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의 또다른 목표는 제주에서 전통예술의 대를 이을 인재를 키우는 것. 어린 시절 호남여성농악단의 일원으로 공연장에서 자란 그는 후학들에게도 관객과 함께 호흡하며 한바탕 놀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고 싶단다. 무대와 관객을 중심으로 풍부한 현장경험을 쌓은 공연전문예술인을 양성하는 것이 그가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이다. (제주=연합뉴스) 김지선 기자 -->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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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28
  • 한국 신무용의 대표적인 인물 - 최승희와 조택원
    피카소가 후원한 최승희보석 휘감은 '보살춤' 인기…美·유럽 공연 500회 넘어해방 후 월북…말년에 숙청개인 발표회 먼저 한 조택원피아노 반주로 승무 창작춤…최승희 제자와 같이 공연도韓-日 문화외교에 큰 역할 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한국 신무용은 일제 식민지 강점기에 태어났다. 춤으로 사상을 표현할 수 있다고 깨달은 지식층 젊은이들이 서양식 테크닉에 조선의 문화를 접목해 신무용이라 했다. 가장 암울한 시대에 태어난 한국춤인 만큼 신무용은 억압받는 조선인들에게 즐거움은 물론 긍지를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조선의 춤은 조선인뿐만 아니라 국경을 넘어 일본과 중국 관객들에게, 세계 2차대전의 포연 속에서 이 춤을 본 바다 건너 서구 관객들에게도 황홀함과 감동을 선사했다.◆ 함흥군수의 아들과 양반가의 딸 한국 신무용의 대표적인 인물이 최승희(1911~1967)와 조택원(1907~1976)이다. 이 두 사람은 양반가문에서 태어나 학과성적도 우수했을 뿐만 아니라 예체능과 글재주 등 다방면에 출중해 주위 사람들로부터 많은 기대와 촉망을 한몸에 받았다.함흥군수인 조부와 대한제국 군인 부친을 둔 조택원은 소학교 시절부터 러시아 혁명에 쫓겨 함경북도 타국까지 피난 온 러시아인들을 가까이서 접했다. 비운의 현실 속에서도 밤만 되면 자신들의 민족 춤을 추며 시름을 달래는 러시아인들을 보고 춤에 대한 꿈을 품기 시작했다.정승판서 가문에, 아버지는 진사에 합격한 양반가 출신 최승희는 열여섯 살 되던 1926년, 경성의 공회당에서 처음으로 춤 공연을 보게 됐다. 당시 조선에 처음으로 공연 온 일본의 이시이 바쿠 무용단의 춤을 관람했는데, 조국의 현실을 생각나게 한 ‘사로잡힌 사람’이 그를 매료시켰다. 공연이 끝나고 최승희는 무대 뒤에서 이시이 바쿠를 만나 춤을 배울 결심을 했다. 네 살 위의 조택원이 춤을 먼저 알았지만, 본격적 수련은 최승희가 먼저 시작한 셈이다. 최승희는 주위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도망치듯 춤을 배우러 일본으로 간 지 1년 만에 인기를 얻었다. 조택원은 이시이 바쿠의 두 번째 조선 공연에서 역시 ‘사로잡힌 사람’을 보고 그의 문하생이 됐다.◆ 같은 스승…불교 소재로 춤 창작최승희와 조택원은 같은 스승 아래에 있는 동료로서 함께 작품에 출연하기도 했다. 조택원은 1933년 독립해 첫 번째 개인 발표회를 가졌다. 그중 하나가 승무를 소재로 만든 창작춤 ‘승무의 인상 (1933)’이다. 이 춤 제목은 1943년 시인 정지용에 의해 ‘가사호접’으로 바뀌었다. 전통적 고깔과 장삼을 입고 춤을 추되 국악기가 아닌 피아노와 바이올린 연주를 반주로 하는 ‘가사호접’의 춤과 제목은 조택원을 대표하는 상징작이 됐다.같은 해 개인 발표회를 연 최승희도 한국적 창작춤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여기서 공연한 ‘에헤라 노아라’라는 한량춤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최승희의 전성기가 시작됐다. 최승희를 대표하는 작품은 맨몸에 보석을 휘감은 채 손으로만 표현하는 ‘보살춤 (1937)’이다. 둘 다 불교적 소재로 자신의 대표작을 만든 것이 공통점이다. 훗날 조택원이 미국에 체류하고 있을 때 그를 후원해준 미국의 신무용가 루스 세인트 데니스 역시 ‘보살춤’과 아주 흡사한 ‘콴인’이라는 작품을 발표했다.◆ 해외에서 더 유명했던 조선 무용가최승희가 미국의 흥행사 휴록의 기획으로 세계 공연을 떠났을 때, 조택원은 국내에서 개인 공연을 위해 같이 춤을 출 여자 파트너를 찾고 있었다. 최승희는 대부분 혼자서 춤을 췄지만 여자치고는 기골이 장대해서 남녀듀엣이 필요한 경우, 최승희가 남자역을 도맡아서 했기 때문에 남자 무용수가 필요없었다. 남자인 조택원의 경우는 달랐다. 그때 생각해 낸 것이 최승희의 제자 김민자였다. 그녀는 조선에서 처음으로 토슈즈를 신을 줄 알았던 실력 있는 무용수였지만 최승희의 그늘에 가려 빛을 발휘할 기회가 없었다. 최승희가 해외 장기 공연을 떠나버려 기약없이 몇 년간 스승의 집안일만 돌봐야 했던 차에 조택원의 러브콜은 뿌리칠 수 없는 유혹 이상이었을 것. 김민자는 선뜻 요청을 수락했고 해외에서 이 사실을 들은 최승희는 불같이 화를 내며 국제전화를 걸어 조택원과 언성을 높였다고 한다. 자기 허락도 없이 외간남자(?)와 춤 파트너가 된것도 모자라 단독 공연까지 감행한 제자의 당돌한 행위는 당시의 정서로는 용납이 안 되는 배신행위나 다름없었다. 이 일로 김민자는 근신조치를 받게 됐고, 결혼을 핑계로 스승의 곁을 떠났다. 소유욕과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던 최승희가 자기의 제자를 데려간 조택원을 좋게 보았을 리는 없었겠다는 추측이다.조택원은 1937년 프랑스로 건너가 공연을 시도했다. 해방 직후엔 미국에 머무르면서 현대 무용사의 거장 루스 세인트 데니스의 후원 아래 미국 순회공연을 했다. 조선춤으로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각각 500여회가 넘는 공연을 했다는 사실은 그들의 예술적 감각은 물론 조선의 춤이 얼마나 경쟁력 있는 것이었는지 새삼 일깨워준다.뛰어난 외모를 겸비한 이들은 영화에도 출연했다. 최승희는 자전적 영화 ‘반도의 무희’와 ‘대금강산보’에 출연하고 ‘이태리 정원’ 앨범을 취입했는데, 지금은 음반밖에 남지 않았다. 조택원은 영화 ‘미몽:죽음의 자장가(1936)’에서 바람난 유부녀 애순(문예봉)이 사모하는 무용가로 출연했다. 이 필름은 현존 조선의 유성영화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문화재에 등재됐다. 시중에서도 구할 수 있어 젊은 조택원의 춤과 연기를 감상할 수 있다. 국경을 초월해 그들을 아끼는 유명 후원인들도 있었다. 최승희에게는 할리우드 배우 로버트 테일러나 피카소 등이 있었고, 조택원에게는 펄벅 여사가 있었다.◆ 해방 직후 남과 북으로 갈린 운명이들의 운명은 해방 이후 희비가 엇갈렸다. 문화말살정책 속에서도 당당히 ‘코리안’을 표기하며 조선춤만으로 활동했던 최승희는 막바지에 일본군을 위한 위문공연을 했다는 비난으로 남한에서 버티지 못한 채 해방 직후 남편 안막을 따라 월북했다. 조택원은 위문공연을 피해 미국으로 갔지만 친일색이 짙은 무용시 ‘부여회상곡(1942)’을 올렸다는 이유와 미국에서 이승만 정권을 비방했다는 이유로 정부 수립 이후에도 한동안 귀국하지 못하는 풍운을 겪었다. 사랑 없는 결혼을 거부하고 자유로운 활동을 위해 결혼과 이혼을 거듭했던 ‘모던보이’ 조택원은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 반면 ‘신여성’ 최승희는 가족에게만큼은 ‘여필종부’였다. 결국 한 사람은 남에서, 한 사람은 북에서 조선의 춤을 발전시키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월북한 최승희는 김일성으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고 탄탄대로를 달렸다. 지금의 옥류관을 무용연구소로 하사받았고, 총천연색 춤 영화 제작까지 지원받았다. 조택원은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입국금지를 받아 오랜 방랑 끝에 1960년 13년의 타국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다. 이듬해부터 그는 한국 무용협회 고문이 되며 문화훈장을 받는 등 일생 동안 한국춤 발전을 위해 활동했다. 최승희는 많은 후원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 사회에 적응하기를 거부하며 험난한 길을 자처했다. 주체사상이 도입되면서부터 남편이 먼저 숙청되고 자신의 모든 관직도 박탈당했다. 심지어 딸 안성희가 대중 앞에서 자신을 공개 비판하는 등 걷잡을 수 없는 몰락의 길을 걷는다.안정적인 말년을 살았던 조택원은 후세 사람들에게 최승희만큼의 강렬함은 남기지 못했다. 그의 뒤를 이을 제자를 키우거나 자신의 춤을 계승할 이론을 많이 남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승희의 매니저를 자처한 남편은 그녀를 하나의 문화상품으로 포장해 스타마케팅에 성공했다. 조택원은 그럴만한 매니저를 두지 못했지만, 세련된 매너와 사교성으로 독자적인 외교를 펼쳐나가 문화예술계는 물론 일본의 정·관계 인사들까지 인맥을 형성해 대한민국 외교사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결국 최승희는 1967년께 반동으로 몰려 숙청당해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조택원은 예술인들의 애도 속에 1976년 지병으로 별세했다. 남과 북으로 상징될 수 있는 조택원과 최승희의 일생은 한국 근대사의 슬픈 단면이기도 하다. [무용평론가 이 동우] --> 한국경제 기사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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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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