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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모안내] 2024 상반기 국악 영아티스트 육성사업 '청춘, 풍류의 시간' (신청기간 3월 6일~3월 29일)
    ▶ 새미기픈물 홈페이지 바로가기 북촌한옥마을에 위치한 가회152는 전통문화컨텐츠그룹 새미기픈믈에서 운영하는 한옥복합문화공간으로서, 젋은 전통예술인의 활동과 교류를 지원하고, 자연음향을 기반으로 풍류의 장을 선사합니다. 젋은 국악인들의 발전과 전통문화예술을 위해 오디션 수상자에게 독주회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합니다.·사 업 명 : 2024 상반기 국악 영아티스트 육성사업 <청춘, 풍류의 시간> ·참가부문: 국악 (기악, 성악)·참가대상 : 중등부/ 고등부 / 대학부(휴학생 가능) / 신인부(대학졸업~만34세) ·심사일시: 2024년 4월 초 예정.·신청기간 : 2024년 3월 6일 ~ 2024년 3월 29일·심사방법: 영상심사 (장단 없이 진행)·참가곡: 자유곡 1곡 (5분내외 / 산조: 진양, 자진모리)·심사위원: 대학 출강 강사 이상의 전문가 또는 그에 준하는 전문가 3인 예정.·제출서류 : 1) 신청서 (홈페이지 다운로드)2) 재학증명서 (청소년 홈스쿨 가능) 또는 신분증 3) 연주영상 (유튜브 업로드 후 링크첨부)·접수방법 : 이메일 신청 (kipeunsaem@gmail.com)·참가비: 10만원 (신청과 함께 입금 필수, 입금 확인문자 발송 예정. / 환불불가) ·수상자 독주회 지원 내용: 1) 전체대상-대관료 100% 지원 + 금준당 기본한복 1벌 무료맞춤2) 최우수상-대관료 50% 지원 + 금준당 한복 1벌 무료대여3) 우수상-대관료 30% 지원 + 금준당 한복 1벌 무료대여4) 장려상-대관료 10% 지원 + 금준당 한복 1벌 무료대여5) 아차상-미수상 합격자 + 금준당 한복 1벌 무료대여 ·발 표 : 홈페이지 공지, 개별통보·수상자 독주회 일정: 2024년 4월 ~ 6월 30일·문 의 : 가회152 한옥풍류 (010-2195-2594, kipeunsae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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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연대회,공모
    2024-03-28
  • [KBS국악한마당 방송안내] 3월 30일 오후 12시 10분 (고금성,이희문,조원석,김주현,양진수,김별,강유정 등 출연)
    이번 주 국악한마당에서는새로운 진행자 가애란 아나운서와 함께 합니다.청량한 음색으로 사랑받는 소리꾼 고금성과 파격적인 민요로 대중과 만나온 소리꾼 이희문의 무대를 통해남성 소리꾼만의 색다른 매력을 만날 수 있는 시간 준비했습니다.● 경기민요 <태평가, 청춘가>노래/ 고금성 이희문조원석 김주현 양진수 이채현 남경우반주/ 전통음악집단 샛고금성 ● 서도민요 <배따라기, 자진배따라기, 배치기소리>노래+장구/ 고금성 반주/ 전통음악집단 샛고금성 ● 서도민요 <애원성>노래/ 고금성 징/ 이재하 반주/ 전통음악집단 샛● 경기잡가 <적벽가>노래+장구/ 고금성 이희문 노래/ 조원석 김주현 양진수 이채현 남경우이희문 ● 휘모리잡가 <맹꽁이타령>노래+장구/ 이희문거문고/ 이재하 이희문 ● 경기민요 <오돌독>노래/ 이희문 거문고/ 이재하 반주/ 전통음악집단 샛● 선소리산타령 <자진산타령>경기민요 <개고리타령>노래+장구/ 고금성 이희문 노래+소고/ 조원석 김주현 양진수 이채현 남경우고만고만(GOMAN GOMAN) ● 경기민요 <노랫가락>노래/ 조원석 김주현 양진수 이채현 남경우반주/ 전통음악집단 샛고금성&이희문● 경기민요 <창부타령>노래/ 고금성 이희문반주/ 전통음악집단 샛♛ 꿈나무한마당● 서한우류 <버꾸춤>무용/ 김별 (온양천도초 4학년) ● <벽파 입춤>무용/ 강유정 이재아 박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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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악관련뉴스
    2024-03-27
  • [국악경연대회] 2024 제26회 서편제보성소리축제 전국판소리·고수경연대회 (접수 3월 25일~4월 30일)
    1. 대회명 : 제26회 서편제보성소리축제 전국판소리고수경연대회2. 장소 : 전남 보성군청소년문화의집, 보성군문화예술회관, 보성문화원3. 일시 : 2024년 5월 4일 (예선) ~ 5월 6일 (본선) 4. 주최 / 주관 : 보성군 / 서편제보성소리축제추진위원회5. 접수기간 : 2024년 3월 25일(월) ~ 4월 30일(화)6. 문의전화 : 061-850-58927. 대회정보 더보기 ▶ 신청서 다운로드8. 대회목적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인 판소리의 계승발전을 위하여 경연대회를 통한 인재발굴 및 육성9. 참가자격 :◦ 대한민국 국민으로 만18세(2006. 5. 3. 이전 출생자) 이상의 남녀 및 학생 (초·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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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연대회,공모
    2024-03-27
  • [국악경연대회] 2024 제22회 구례전국가야금경연대회 참가안내 (접수 4월1일~4월21일)
    1. 대회명 : 제22회 구례전국가야금경연대회2. 장소 :섬진아트홀 (전남 구례군 구례읍 구례로 508) ▶ 지도보기 3. 일시 : 2024년 5월 3일(금) ~ 5월 5일(일) 4. 주최 / 주관 : 구례군, (사)가야금병창보존회5. 접수기간 : 2024년 4월 1일(월) ~ 4월 21일(일) 6. 문의전화 : 044-862-23407. 대회정보 더보기 ▶ 신청서 다운로드8. 대회목 : 가야금 명인 서공철의 고향인 전남 구례에서 가야금 음악의 전승과 보존, 보급을 위해 재능 있는 전국의 가야금 인재들을 발굴하고 연주 활동을 체계적이고 전문적으로 지원 육성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개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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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연대회,공모
    2024-03-26
  • [아리랑소식] 송가인 - 서경덕, 삼일절 맞아 '아리랑' 나운규 다국어 영상 제작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삼일절을 맞아 가수 송가인과 함께 일제강점기 시절 민족의 혼이 담긴 무성 영화 '아리랑'을 제작한 춘사(春史) 나운규(1902∼1937)를 소개하는 다국어 영상을 제작했다고 오늘(2월 29일) 밝혔습니다. 서 교수는 한국어 및 영어 버전의 4분 30초짜리 영상을 오늘 온라인에 공개했습니다. 이 영상은 KB국민은행 '대한이 살았다' 캠페인의 일환으로 제작됐습니다. 송가인은 한국어 내레이션을 맡았고, 아리랑 일부 구절을 직접 부르기도 했습니다. 영상은 감독, 각본, 주연까지 1인 3역을 맡은 나운규의 생애를 다루면서 한국 영화사에 기념비적인 작품 '아리랑'을 소개합니다. 또 일제강점기 시절 민족의식을 일깨운 영화 '아리랑'의 반응이 폭발적이었고, 수많은 관객에게 위로와 희망을 준 새로운 방식의 항일운동이었다는 점을 조명합니다. ▶ 해당기사 더보기
    • 국악정보
    • 아리랑소식
    2024-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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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리랑’ 주제 UCC 9월 15일까지 공모
    (사)정선아리랑제위원회(위원장 이종영)가 ‘아리랑’을 주제로 UCC 작품을 공모한다. 이번 공모전은 전국 청소년을 대상으로 오는 6일부터 9월 15일까지 접수하며 대상작품은 상금 100만원을 시상한다. 수상자는 정선아리랑제위원회와 공동주관처인 등대영화제 조직위원회에서 해당학교 및 기업체에 응모자의 우수한 재능과 수상내역을 통지, 추천한다. 정선/박창현 ▶ 해당기사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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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리랑소식
    • 아리랑뉴스
    2012-08-29
  • 8월 27일부터 5일간 ~ 국악방송 ‘꿈꾸는 아리랑’ 국악 재조명
    ▲ 국악방송 ‘꿈꾸는 아리랑’ 10인의 출연진들. (위 왼쪽부터) 임진모, 이지영 (가운데) 장재효, 윤지은, 김희선, 황우창 (아래 왼쪽부터) 이정헌, 허윤정, 이예준, 김동원. (사진제공: 국악방송) 국악평론가 윤중강 진행… 10인 명사 참여 [천지일보=박선혜 기자] 한국음악전문채널 국악방송이 ‘세계음악으로서의 국악’을 재조명하기 위해 ‘기획특집-국악 세계화, 10인에게 길을 묻다’를 오는 27일부터 5일간 방송한다. 이 프로그램은 국악평론가 윤중강이 진행하는 ‘꿈꾸는 아리랑’의 기획특집으로, 연주자·평론가·월드뮤직축제 관계자·문화행정가 등 한국음악을 대표하는 10인의 명사와 함께한다. 명사로는 김동원, 김희선, 윤지은, 이예준, 이정헌, 이지영, 임진모, 장재효, 허윤정, 황우창 등이 출연한다. 이들은 세계 속의 한국음악을 짚어보고 나아갈 방향을 모색한다. 또 월드뮤직시장을 달구고 있는 다양한 음악과 해외로 뻗어나가는 젊은 음악인들의 인터뷰를 비롯해 해외 월드뮤직 관계자들의 인터뷰를 담을 예정이다. 해당기사 더 보기 -> http://www.newscj.com/news/articleView.html?idxno=145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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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악관련뉴스
    2012-08-29
  • 제주에 터잡은 채상소고춤 김운태 명인
    채상소고춤 --> 다음카페 바로가기 "전통무대공연 개발..공연예술인 키우겠다" "앞으로 제주도는 물론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전통무대공연을 개발하고 싶습니다. 제주는 전통예술부흥은 물론 공연예술인을 키우는 메카가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 동영상 뉴스보기 전립(모자)에 흰 띠를 달아 돌리면서 추는 채상소고춤의 명인 김운태(48)씨가 9일 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 제주민속촌박물관 공연장에서 나긋한 춤동작을 시작하자 관객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호남·영남·경기의 독특한 장단과 함께 다양한 춤사위가 흘러나왔고, 엇박으로 띠를 빠르게 돌리며 기예에 가까운 동작을 선보일 때마다 관객들은 신이 나 저절로 어깨를 들썩였다. 소고춤을 통합한 젊은 예인으로 이름난 그는 벌써 2년 넘게 제주도에 머물며 하루에 세 차례 공연을 하고 있다. 제주의 전문예술공연단체인 '전통노리안 마로'와 함께 '전통예술흥행프로젝트-명인'의 예술감독을 맡은 김씨는 지난 1일 이정희(김숙자류 매헌춤보존회 회장)의 도살풀이춤을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이날 역시 19일 있을 국립국악원 공연을 앞두고 예기(藝妓)인 장금도(83.여) 명인의 민살풀이춤에 고수로 나서 호흡을 맞추는 중이었다. 2009년 두달만 머물고자 제주에 내려온 그는 퓨전 열풍에 밀려 외면받고 있는 전통예술을 부흥하기 위해 마로의 젊은 예인들과 함께 제주도에 남은 인생을 걸어 보기로 의기투합했다. 공연장과 가까운 곳에 민박집을 통째로 빌려 먹고 자며 관객과 예술가 모두 감동과 흥을 누릴 수 있는 무대를 연구하고 있다. 지천명(知天命)을 앞둔 그에겐 아침저녁으로 운동하며 체력관리를 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일과다. "서울에는 예술가가 예술만 하고 살기가 힘들지만 제주도는 다릅니다. 국내외에서 찾아오는 관광객이 늘 있기 때문에 관객을 확보하기 쉽고, 옛날 예인들처럼 살 수 있어 문화 자체가 상품이 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죠." 삶이 춤에 녹아내려 자연스럽게 몸에 배야 한다고 믿는 그에게 삶 자체가 예술이 될 수 있는 제주는 그야말로 '황금밭'이었던 셈이다. 예술의 기운이 샘솟는 천혜의 자연조건에서 작품을 잘 만들고 사람을 잘 키우면 일본의 가부키를 능가하는 문화상품을 만들 수 있다는 그는 2013년께 제주시내권에 전용극장을 만들기 위해 준비 중이다. 이곳에서 제주도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민속예술작품을 상시공연하고 나아가 정재(궁중무용) 등 궁중예술도 볼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의 또다른 목표는 제주에서 전통예술의 대를 이을 인재를 키우는 것. 어린 시절 호남여성농악단의 일원으로 공연장에서 자란 그는 후학들에게도 관객과 함께 호흡하며 한바탕 놀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고 싶단다. 무대와 관객을 중심으로 풍부한 현장경험을 쌓은 공연전문예술인을 양성하는 것이 그가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이다. (제주=연합뉴스) 김지선 기자 -->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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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악인소식
    2012-08-28
  • '전통문화 한류' 로드맵 만든다
    지원 법률안 발의···정책토록회서 의견 수렴K-pop 등 대중문화를 중심으로 한 '한류 열풍'을 전통문화로까지 확산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정부 역시 전통문화의 세계화에 대한 의지가 크다. 하지만 정작 국내에서조차 전통문화는 아직 제대로 된 산업이라고 말하기도 부족한 수준이다. 이에 전통문화 발전을 위해 전통문화를 독립된 산업으로 만들기 위한 법체계 수립, 체계적이고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실제로 이를 위해 법안을 발의한 국회의원도 있다.한나라당 김광림 의원 등은 지난달 21일 '전통문화산업의 진흥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했다. 이는 문화체육관광부장관에 의해 시행돼야 하는 사항으로 △중·장기 기본계획 3년마다 수립 △실태조사 △전통문화산업 표준화 권고 △전통문화촌 지정 및 지원 △전문인력 양성 등 15가지의 주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전통문화를 산업화해서 체계적인 실태 조사와 파악, 산업 표준화, 인력 양성, 정부차원에서 지원 확대 등이 골자다.또 지난 2011년 11월 9일 국회에서 열린 '전통문화, 산업화의 길을 열다'라는 정책토론회에서는 보다 구체적인 의견들이 오갔다. 이날 한복려 궁중음식연구원 이사장은 '한류 속의 전통문화'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드라마 '대장금'은 역사적 사실에만 국한되지 않고 외식, 출판, 영상, 게임, 애니메이션, 음악, 관광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끼치며 산업적 효과를 거뒀다"며 "이는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재발견과 자신감을 심어주었다"고 말했다.한 이사장은 이어 "품격있는 한식으로 국제적 위상을 올리기 위해서는 훌륭한 식문화가 담겨진 메뉴를 만들어 무형의 유산이 되도록 해야한다"며 "의궤, 궁중연회도 등 훌륭한 기록문화유산을 통해 한국의 최고 문화를 통합적 브랜드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고문헌이나 민화에서 가치 있는 문화적 자료를 더 발굴해 디자인과 스토리텔링을 새롭게 하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왕릉 등 유적 활용방안도 모색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전통문화, 산업의 날개를 달다'를 주제로 발표한 유동환 안동대 한국문화산업전문대학원 교수는 "전통문화는 제품이 아니라 문화가치를 파는 4차산업"이라며 육성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유 교수는 의류·식품·공예·건축 등을 포함한 국내 전통문화산업 규모는 전통의류 5조1187억원, 전통식품 9조6390억원, 전통공예 2조6천881억원, 전통건축이 7조6618억원 등 총 25조1077억원으로 전체 산업대비 약 10% 수준이라고 설명했다.그는 전통문화산업 규모가 미약한 원인으로 전승자 부재, 상품 디자인 기획 및 마케팅력 부족, 가내 수공업 수준의 기업환경, 협소한 내수시장, 온라인 시장 미정착, 단기행사성 정책 지원 및 부처별 사업 분산 등을 언급했다.유 교수는 "전통문화의 산업화를 위해서는 대량생산, 표준화, 문화가치 중심의 차별화 전략 등이 필요하다"며 "특정계층 의존형 시장 구조에서 벗어나 소비자들의 숨은 욕구를 찾아 상품화하는 시장선도형 산업으로 변화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그는 또 전통문화촌 지정·육성, 전통문화산업단지 진흥, 소재와 문양 등 전통문화자원을 활용한 상품화 지원, 전통문화산업 공동브랜드 개발, 관광과 연계한 전통의례 및 생활체험 프로그램 보급 등 산업융합형 사업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머니투데이 기사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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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28
  • 2011년 11월 8일 부산국악방송 (FM 98.5MHz) 개국
    국악전문채널인 '부산국악방송'이 2011년 11월 8일 오후 부산국악원 연악당에서 개국식을 갖고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갔다. 이날 개국식에는 허남식 부산시장 등 내외빈이 참석해 부산국악방송의 출범을 축하했다. 이어 열린 부산국악방송 개국기념 공연에서는 서편제의 소리꾼이자 국악방송 '창호에 드린 햇살'의 진행자인 오정해 씨의 진행으로 부산국악원 정악단을 비롯해 부산민속예술보존회, 김용우, 이종대, 박대성, 박환영, 김남순, 권은영, 신문범 등의 명인들과 2011년 '21C 한국음악프로젝트'에서 대상을 수상한 어쿠스틱 앙상블 재비가 신명나는 공연을 펼쳤다. 부산국악방송은 FM 98.5MHz를 통해 부산과 김해, 양산시 일부지역의 청취자 350만 명을 대상으로 전파를 쏜다. 전통음악의 대중화와 세계화를 지향하는 이 방송은 판소리, 민요, 정가 등 다양한 전통음악을 비롯해 퓨전창작음악, 문화계 소식, 특강, 실황중계, 인물 초대석, 국악교육 프로그램 등 다양한 장르의 프로그램을 24시간 방송하게 된다. 먼저, 전통음악 전문 감상 프로그램인 '흐르는 음악처럼'(매일 오전 3~5시)이 김민경 아나듀서의 진행으로 부산에서 자체 제작하고, 문화예술 정보 프로그램인 '꿈꾸는 아리랑'(매일 오후 4~5시40분)은 다양한 음악과 국악계 소식을 전하는 시간으로 꾸며진다. 또 각 지역의 국악소식을 전하는 '꿈꾸는 아리랑'의 국악소식 通(통)을 통해 매주 월요일 김민경 아나듀서의 진행으로, 부산을 비롯한 김해와 양산시 일대의 다양한 국악소식을 생방송으로 전한다. 더불어 실황 음악 중계 프로그램인 'FM국악당'(매일 오후 7시30분~오후 9시)은 매주 금요일마다 부산을 비롯한 김해, 양산지역의 다양한 공연을 중계방송할 예정이다. 이 밖에도 부산국악방송은 전통음악방송에 걸맞게 부산국악원 내 연주소를 마련하고, 부산지역의 전통음악 확산에 다방면으로 기여도 할 계획이다. 부산 뉴시스 하경민 기자 ->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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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28
  • 한국 신무용의 대표적인 인물 - 최승희와 조택원
    피카소가 후원한 최승희보석 휘감은 '보살춤' 인기…美·유럽 공연 500회 넘어해방 후 월북…말년에 숙청개인 발표회 먼저 한 조택원피아노 반주로 승무 창작춤…최승희 제자와 같이 공연도韓-日 문화외교에 큰 역할 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한국 신무용은 일제 식민지 강점기에 태어났다. 춤으로 사상을 표현할 수 있다고 깨달은 지식층 젊은이들이 서양식 테크닉에 조선의 문화를 접목해 신무용이라 했다. 가장 암울한 시대에 태어난 한국춤인 만큼 신무용은 억압받는 조선인들에게 즐거움은 물론 긍지를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조선의 춤은 조선인뿐만 아니라 국경을 넘어 일본과 중국 관객들에게, 세계 2차대전의 포연 속에서 이 춤을 본 바다 건너 서구 관객들에게도 황홀함과 감동을 선사했다.◆ 함흥군수의 아들과 양반가의 딸 한국 신무용의 대표적인 인물이 최승희(1911~1967)와 조택원(1907~1976)이다. 이 두 사람은 양반가문에서 태어나 학과성적도 우수했을 뿐만 아니라 예체능과 글재주 등 다방면에 출중해 주위 사람들로부터 많은 기대와 촉망을 한몸에 받았다.함흥군수인 조부와 대한제국 군인 부친을 둔 조택원은 소학교 시절부터 러시아 혁명에 쫓겨 함경북도 타국까지 피난 온 러시아인들을 가까이서 접했다. 비운의 현실 속에서도 밤만 되면 자신들의 민족 춤을 추며 시름을 달래는 러시아인들을 보고 춤에 대한 꿈을 품기 시작했다.정승판서 가문에, 아버지는 진사에 합격한 양반가 출신 최승희는 열여섯 살 되던 1926년, 경성의 공회당에서 처음으로 춤 공연을 보게 됐다. 당시 조선에 처음으로 공연 온 일본의 이시이 바쿠 무용단의 춤을 관람했는데, 조국의 현실을 생각나게 한 ‘사로잡힌 사람’이 그를 매료시켰다. 공연이 끝나고 최승희는 무대 뒤에서 이시이 바쿠를 만나 춤을 배울 결심을 했다. 네 살 위의 조택원이 춤을 먼저 알았지만, 본격적 수련은 최승희가 먼저 시작한 셈이다. 최승희는 주위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도망치듯 춤을 배우러 일본으로 간 지 1년 만에 인기를 얻었다. 조택원은 이시이 바쿠의 두 번째 조선 공연에서 역시 ‘사로잡힌 사람’을 보고 그의 문하생이 됐다.◆ 같은 스승…불교 소재로 춤 창작최승희와 조택원은 같은 스승 아래에 있는 동료로서 함께 작품에 출연하기도 했다. 조택원은 1933년 독립해 첫 번째 개인 발표회를 가졌다. 그중 하나가 승무를 소재로 만든 창작춤 ‘승무의 인상 (1933)’이다. 이 춤 제목은 1943년 시인 정지용에 의해 ‘가사호접’으로 바뀌었다. 전통적 고깔과 장삼을 입고 춤을 추되 국악기가 아닌 피아노와 바이올린 연주를 반주로 하는 ‘가사호접’의 춤과 제목은 조택원을 대표하는 상징작이 됐다.같은 해 개인 발표회를 연 최승희도 한국적 창작춤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여기서 공연한 ‘에헤라 노아라’라는 한량춤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최승희의 전성기가 시작됐다. 최승희를 대표하는 작품은 맨몸에 보석을 휘감은 채 손으로만 표현하는 ‘보살춤 (1937)’이다. 둘 다 불교적 소재로 자신의 대표작을 만든 것이 공통점이다. 훗날 조택원이 미국에 체류하고 있을 때 그를 후원해준 미국의 신무용가 루스 세인트 데니스 역시 ‘보살춤’과 아주 흡사한 ‘콴인’이라는 작품을 발표했다.◆ 해외에서 더 유명했던 조선 무용가최승희가 미국의 흥행사 휴록의 기획으로 세계 공연을 떠났을 때, 조택원은 국내에서 개인 공연을 위해 같이 춤을 출 여자 파트너를 찾고 있었다. 최승희는 대부분 혼자서 춤을 췄지만 여자치고는 기골이 장대해서 남녀듀엣이 필요한 경우, 최승희가 남자역을 도맡아서 했기 때문에 남자 무용수가 필요없었다. 남자인 조택원의 경우는 달랐다. 그때 생각해 낸 것이 최승희의 제자 김민자였다. 그녀는 조선에서 처음으로 토슈즈를 신을 줄 알았던 실력 있는 무용수였지만 최승희의 그늘에 가려 빛을 발휘할 기회가 없었다. 최승희가 해외 장기 공연을 떠나버려 기약없이 몇 년간 스승의 집안일만 돌봐야 했던 차에 조택원의 러브콜은 뿌리칠 수 없는 유혹 이상이었을 것. 김민자는 선뜻 요청을 수락했고 해외에서 이 사실을 들은 최승희는 불같이 화를 내며 국제전화를 걸어 조택원과 언성을 높였다고 한다. 자기 허락도 없이 외간남자(?)와 춤 파트너가 된것도 모자라 단독 공연까지 감행한 제자의 당돌한 행위는 당시의 정서로는 용납이 안 되는 배신행위나 다름없었다. 이 일로 김민자는 근신조치를 받게 됐고, 결혼을 핑계로 스승의 곁을 떠났다. 소유욕과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던 최승희가 자기의 제자를 데려간 조택원을 좋게 보았을 리는 없었겠다는 추측이다.조택원은 1937년 프랑스로 건너가 공연을 시도했다. 해방 직후엔 미국에 머무르면서 현대 무용사의 거장 루스 세인트 데니스의 후원 아래 미국 순회공연을 했다. 조선춤으로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각각 500여회가 넘는 공연을 했다는 사실은 그들의 예술적 감각은 물론 조선의 춤이 얼마나 경쟁력 있는 것이었는지 새삼 일깨워준다.뛰어난 외모를 겸비한 이들은 영화에도 출연했다. 최승희는 자전적 영화 ‘반도의 무희’와 ‘대금강산보’에 출연하고 ‘이태리 정원’ 앨범을 취입했는데, 지금은 음반밖에 남지 않았다. 조택원은 영화 ‘미몽:죽음의 자장가(1936)’에서 바람난 유부녀 애순(문예봉)이 사모하는 무용가로 출연했다. 이 필름은 현존 조선의 유성영화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문화재에 등재됐다. 시중에서도 구할 수 있어 젊은 조택원의 춤과 연기를 감상할 수 있다. 국경을 초월해 그들을 아끼는 유명 후원인들도 있었다. 최승희에게는 할리우드 배우 로버트 테일러나 피카소 등이 있었고, 조택원에게는 펄벅 여사가 있었다.◆ 해방 직후 남과 북으로 갈린 운명이들의 운명은 해방 이후 희비가 엇갈렸다. 문화말살정책 속에서도 당당히 ‘코리안’을 표기하며 조선춤만으로 활동했던 최승희는 막바지에 일본군을 위한 위문공연을 했다는 비난으로 남한에서 버티지 못한 채 해방 직후 남편 안막을 따라 월북했다. 조택원은 위문공연을 피해 미국으로 갔지만 친일색이 짙은 무용시 ‘부여회상곡(1942)’을 올렸다는 이유와 미국에서 이승만 정권을 비방했다는 이유로 정부 수립 이후에도 한동안 귀국하지 못하는 풍운을 겪었다. 사랑 없는 결혼을 거부하고 자유로운 활동을 위해 결혼과 이혼을 거듭했던 ‘모던보이’ 조택원은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 반면 ‘신여성’ 최승희는 가족에게만큼은 ‘여필종부’였다. 결국 한 사람은 남에서, 한 사람은 북에서 조선의 춤을 발전시키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월북한 최승희는 김일성으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고 탄탄대로를 달렸다. 지금의 옥류관을 무용연구소로 하사받았고, 총천연색 춤 영화 제작까지 지원받았다. 조택원은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입국금지를 받아 오랜 방랑 끝에 1960년 13년의 타국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다. 이듬해부터 그는 한국 무용협회 고문이 되며 문화훈장을 받는 등 일생 동안 한국춤 발전을 위해 활동했다. 최승희는 많은 후원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 사회에 적응하기를 거부하며 험난한 길을 자처했다. 주체사상이 도입되면서부터 남편이 먼저 숙청되고 자신의 모든 관직도 박탈당했다. 심지어 딸 안성희가 대중 앞에서 자신을 공개 비판하는 등 걷잡을 수 없는 몰락의 길을 걷는다.안정적인 말년을 살았던 조택원은 후세 사람들에게 최승희만큼의 강렬함은 남기지 못했다. 그의 뒤를 이을 제자를 키우거나 자신의 춤을 계승할 이론을 많이 남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승희의 매니저를 자처한 남편은 그녀를 하나의 문화상품으로 포장해 스타마케팅에 성공했다. 조택원은 그럴만한 매니저를 두지 못했지만, 세련된 매너와 사교성으로 독자적인 외교를 펼쳐나가 문화예술계는 물론 일본의 정·관계 인사들까지 인맥을 형성해 대한민국 외교사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결국 최승희는 1967년께 반동으로 몰려 숙청당해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조택원은 예술인들의 애도 속에 1976년 지병으로 별세했다. 남과 북으로 상징될 수 있는 조택원과 최승희의 일생은 한국 근대사의 슬픈 단면이기도 하다. [무용평론가 이 동우] --> 한국경제 기사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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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28
  • 군산의 마지막 권번 출신 기생(妓生) 김난주 할머니
    "기생질 허고 싶어 시집서 두 번 도망쳤지" [인터뷰] 군산의 마지막 권번 출신 기생(妓生) 김난주 할머니동네 회갑연에 초대되어 헌수를 도와주는 김난주(좌) 45세 때 모습. 윤기 흐르는 머리가 시선을 끈다.(1971년) 칼바람이 볼을 때리던 지난 2011년 12월 15일. 군산의 마지막 권번(가무를 가르쳐 기생을 양성하는 곳) 출신 기생(妓生) 김난주(85) 할머니를 찾았다. 60년 가까이 이웃으로 살아온 김 할머니 댁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골목 끝 집이었다. 좁고 짧았지만, 6~7가구가 오무래 오무래 살던 골목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모두 떠나고 김 할머니네 한 집만 남아 고요가 흐르는 골목을 지키고 있었다. 금방 갈아놓은 먹물처럼 번들번들하던 기와지붕이 세월의 풍상에 시달리다 깨지고 탈색되어 마음을 짠하게 했다. 대문을 여는 순간 옛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기생'을 천시하던 시절 김 할머니 댁은 동네에서 조카 이름을 딴 '정선이 고모네 집'으로 통했다. 허물없이 가깝게 지내는 어른들은 '난주네 집'이라 불렀으며, 아이들은 접근하기 어려운 금단의 구역으로 '기생네 집'이라고도 했다. 누가 들을까 봐 쉬쉬하면서. "안녕하셨어요?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아~니, 이게 누구랑가···. 그랴 맞어, 나는 누군가 했제.(웃음) 추운 날 어쩐 일이당가. 어여 안으로 들어와. 우리 집을 다 찾아오고, 참말로 별일이네!" 꼬부랑 할머니가 된 김 할머니는 처음엔 "누구랑가?"하며 고개를 갸웃하더니 3초도 지나지 않아 알아보고는 반가워하며 안방으로 잡아끌었다. 김 할머니는 예상대로 홀로 외롭게 살고 있었다. 옛날에는 친정어머니와 장애인 남동생, 조카 둘, 해서 다섯 식구였다. "그전에는 마당에 장독대랑 샘이랑 있었는데 모두 사라졌네요." "그~라제 조카사위가 고쳐줬어. 그나저나 웬 날이 이렇게 추워, 다리 밑에 거지들 모다 안 얼어 죽었는지 모르겠네. 그쪽은 차니께 이리~이리 아랫목으로 내려오라고. 커피 타줄까? 여그 귤도 하나 먹어보고. 참, 점심은 먹었능가?" 미수(米壽)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목소리 마디마디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낮게 깔린 목소리에는 해학과 풍자가 깔려있고, 끌리듯 당기듯 튕기듯 하면서도 애틋함이 묻어났다. 약간의 수다스러움은 판소리 춘향가에서 월매가 야밤에 찾아온 이몽룡을 반기는 대목을 떠오르게 했다. 평생을 소리(唱)와 함께 살아왔으니 그 여운이 어찌 남아있지 않으랴. "가시네 때 '바람피던' 생각만 나고 못 살겠드라고" ▲ 일본어 교육을 받는 일제강점기 권번 기생들.(김중규의 <군산역사 이야기> 스캔) 김난주(金蘭珠)는 본명으로 1927년 전북 순창 산골에서 태어났다. 예능에 기질을 타고난 그는 어려서부터 기생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스무 살까지 '바람'을 피웠단다. 이곳저곳으로 가무를 배우러 다녔던 것이다. 그러나 부모의 강권으로 결혼식을 올려야 했다. "남원의 안(安)씨 집안으로 시집을 갔는디, 남편은 집에서 글이나 읽는 학자였어. 그리도 어떻게 혀. 그럭저럭 살다 보니께 애기를 하나 낳았는디 어렸을 때 죽어 버렸어. 가시네 때 바람피던(가무 배우던) 생각만 나고 못 살겠드라고. 기생질 허고 싶어서 도망쳤지.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스스로 생과부를 택한 김난주는 스물두 살 되던 해 군산으로 이사한다. 변두리에 방 두 개를 얻어 친정어머니와 남동생과 함께 살았다. 곧바로 소화권번에 입소하여 이기권, 김준섭 등에게 판소리와 장구를 배웠다. 그때 만난 장금도(84, 민살풀이 전승자)와는 60년 넘게 친구로 지내오고 있다. ▲김난주 20대 모습. 우리 소리가 좋아서 기생이 되려고 했다고. 김난주는 동료들에게 '타고났다!'라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구음(口音) 구사를 잘했다. 춤을 추거나 악기를 배울 때 입으로 "나니나~ 나~나니~ 나리룻···" 하며 장단을 맞추다가 그 자체가 음악이 된 구음은 춤판이나 잔치판 등의 흥을 돋워주는 최고의 반주가 되었다. 스물네 살부터는 명월관, 근화각, 동해루, 쌍성루 등 큰 요릿집은 물론, 잔칫집으로 '밤 마실'을 나가기도 했다. 권번의 원칙은 4년을 마치고 시험을 거쳐 허가증을 받아야 하지만 워낙 목(소리)이 좋고 장구 솜씨가 뛰어나 권번에서 눈감아주었다. 김난주 인기는 대단했다. 집에서 곱게 화장하고 있으면 어김없이 권번소속 예기 양성소에서 보낸 인력거가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명월관 방마다 영화배우 닮은 김난주를 찾는 손님이 넘쳐났고, 마루에서 '뽀이'(boy)들이 서로 당기는 바람에 저고리가 찢어지기도 했다. "팁은 한 시간에 기본 2원이었제.(당시 쌀 한가마니 값이 6원) 그러나 두 시간 놀고도 50시간 100시간으로 달아주는 고마운 손님도 있었어. 이런 얘기는 쪼까 거시기 헌디, 손님이 연애를 걸어오기도 혔는디, 마음에 들믄 잠자리를 하기도 했제. (웃음) 하룻밤 사랑이 10년, 30년, 평생을 가는 경우도 있었응께. 그란디 지금은 다 흘러간 꿈이 돼야 뿌렀어!" 다섯 식구 '가장'으로 살아온 인생... 상갓집에서 초대 받기도 ▲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시기인 20대 후반 김난주의 모습. 김난주는 동네에서도 미인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당시 인기 영화배우였던 이경희와 빼닮은 미인으로 알려졌었기 때문. 동료 기생들은 물론 요릿집 손님들은 영화배우 이경희 언니가 행차했다고 반기며 서로 옆에 앉히려고 다툼이 일기도 했다. 20대에 가장이 된 김난주는 열심히 노력했다. 인기 '짱'이었던 그는 1년 남짓 모은 돈으로 'ㄱ'자 기와집도 장만하고. 몸이 불편한 남동생도 장가를 들였다. 친정어머니 수발도 극진히 했다. 조카를 둘이나 보면서 행복을 느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였다. 올케가 남편(동생)과 젖먹이 딸 둘을 놔두고 집을 나가버렸기 때문이었다. 친정어머니가 있다고 하지만, 직장과 집, 양쪽으로 시달려야 했다. 올케가 없는 빈자리를 메워 줘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반세기가 넘는 세월을 조카들 엄마 노릇을 하면서 애처롭게 살아왔다. 그래도 결혼해서 50대 중반이 된 조카들이 엄마처럼 대한단다. ▲ 충청도 광천 부잣집 환갑잔치 마당에서 장구로 흥을 돋우는 김난주.(1973년) 1960~1980년대 김난주는 주로 환갑이나 잔칫집에서 초청을 받고 외출을 나갔다. 동료 기생 2~3명이 함께 가서 자식들이 차례로 부모에게 술잔을 올릴 때 옆에서 도와주며 유창한 선율로 "받으시오, 받으시오, 이 술~ 한~잔을 받으시오"로 시작하는 권주가를 불렀다. 부모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헌수(獻壽)가 끝나면 차일이 쳐진 마당에서 놀이판이 한바탕 벌어졌다. 놀이판에서는 장구, 북, 창, 구음 등으로 분위기를 잡아주었고, 손님들과 환갑을 맞은 본인이 소반에 팁을 놓아주며 흥을 돋우었다. 군산뿐 아니라 김제, 부안, 전주, 이리(익산), 충청도 등지에서도 초청을 받았다. 1박을 해야 하는 충남 대천이나 광천, 부여 등에는 친구이자 민살풀이 일인자인 장금도와 함께 다녔는데, 군산에서 왔다는 기생들을 보려고 몰려든 구경꾼이 잔칫집 마당을 가득 메웠다. 상가(喪家)에서 초대를 받기도 했다. 일반 서민들은 엄두도 못 내지만, 망자가 생전에 벼슬을 했거나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집에서는 출상하는 날 기생을 불렀다. 애절한 소리로 저승으로 향하는 망자의 친구도 되어주고 길잡이도 돼주기 때문이었다. 기생이 요령잡이를 한다는 소문이 초상마당에 돌면 서로 상두꾼을 하려고 모여들었다. 머리에 흰 끈을 질끈 동여맨 기생이 상여에 올라 요령을 흔들면서 청아한 목소리로 만가를 선창하며 이끄는 꽃상여는 그 자체로 대단한 볼거리였으며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 옛날 나비들도 모두 저 세상 사람이 되었어!" ▲ 1960년대 중반 여름 피서지에서 동료들과 함께. 맨 앞이 장금도. 세월의 변화는 물의 흐름과 같아서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법. 40대 후반부터는 외출(잔칫집 행사)이 잦아졌다. 미제 깡통문화에 길들여진 한량들로 세대교체 되면서 우리의 전통 창(唱)에서 벗어나 신식가요를 즐기는 손님이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구음 구사가 뛰어나 버틸 수 있었다고 한다. 나이가 들수록 악기 다루는 솜씨가 능숙해지고 창법도 원숙해지면서 50~60대에는 학원을 개설해서 후배를 가르치기도 하고, 선후배 기생들과 모임을 만들어 내장산, 속리산 등으로 야유회를 다니며 덧없는 세월에 허전해진 마음을 달래기도 했다. 호호백발이 된 김난주 할머니가 기억하는 기생 동료는 민살풀이 일인자 장금도를 비롯해서 금선이, 옥주, 채선이, 혜영이, 난영이, 도심이 등. 그러나 대부분 죽거나 타지로 나가 살고, 장금도만 군산에 살면서 전화로 소식도 전하고 사는 얘기도 나눈단다. 권번에 발을 늦게 들여놓아 기생 경력이 짧지만, 애틋한 사랑을 주고받았던 남자도 몇 된다고 털어놓는 김난주 할머니. 그러나 "지금은 시든 꽃이 돼 뿌렸고, 그 옛날 날아들던 나비들도 모두 저 세상 사람 되었어!"라며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 오마이뉴스 기사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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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28
  • [지음지교를 꿈꾸며] 연극인 이윤택 씨와 중요무형문화재 하용부 씨
    --> 밀양백중놀이 다음카페 바로가기 밀양 춤꾼 어깨춤에 팍 꽂힌 비주류 작가 “평생 같이 갈 겁니다” 밀양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부터 춤만 추고 살았던 춤꾼 하용부 씨(57·중요무형문화재 제68호 밀양백중놀이 예능보유자)와 부산에서 태어난 문인 출신 연극인 이윤택 씨(60). 얼핏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사람의 삶의 궤도는 1988년 부산의 가마골 소극장에서 우연히 교차했다. 둘은 이 만남이 자신들의 삶의 궤도를 바꿔 놓았다고 말한다. “거기서 특별 공연으로 춤을 췄어요. 공연 뒤 까맣고 자그마한 사람이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다가오더니 대뜸 ‘같이 연극 해보지 않을래요?’ 묻는 거예요. ‘저 놈이 미쳤나? 춤추는 사람이 연극을 왜 하냐’라고 속으로 웃어넘겼죠. 연극판에서 이름깨나 날리던 이윤택이란 건 전혀 몰랐죠.”(하 씨) 이 씨는 연극에서 진정한 모국어의 율격과 이미지를 찾으려 모색하던 중 하 씨의 춤과 마주쳤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1980년대 문학계는 ‘해체’와 ‘실천’의 두 축이 있었는데 그는 ‘해체’ 쪽이었다. 권위주의로부터의 해체, 근대성, 식민주의, 사대주의로부터의 해체를 그는 모색했다. 우리가 쓰는 언어가 왜곡되고 굳어 있다고, 현대시가 신라의 향가, 고려 속요보다 못하다고 봤다. “우리 고유의 리듬, 움직임을 찾으려고 굿판도 기웃거렸는데 그때 그의 춤을 본 거예요. 교방춤은 형식미를 추구하는데 그의 춤은 삼박자로 움직이는 게 굉장히 자유로웠어요. 호흡만 가지고 어깨춤을 추는데, 와∼. 그의 표정, 어깻짓, 발짓. 제가 찾는 게 다 있었죠.”(이 씨) 그 이듬해 하 씨를 설득하려고 밀양까지 찾아갔다. 선물이라며 커다란 괘종시계를 품에 안고 온 모습을 하 씨는 생생히 기억한다. 워크숍에서 배우들에게 강의 한번 해달라는 부탁을 하 씨가 수락하면서 시작된 두 사람의 ‘예술적 동거’가 올해로 24년째다. 9일 두 사람을 만나기 위해 밀양연극촌을 찾았다. 극단 연희단거리패를 이끌던 이 씨가 1999년 단원 50여 명을 이끌고 만든 연극 공동체다. 서울도 자주 오가는 두 사람을 굳이 밀양에서 만난 것은 두 사람의 예술적 터전인 밀양에서 인터뷰를 하는 게 마땅하다는 하 씨의 고집 때문이었다. 서울과 부산에 극장을 두고 활동하던 이 씨가 밀양에 연극촌을 세운 것도 하 씨가 이곳 토박이이기 때문이다. 만남 이후 두 사람은 서로에게 풍성한 예술적 자양분이 됐다. 이 씨는 하 씨를 통해 한국적 몸짓을 연극에 접목한 ‘이윤택의 연기론’을 완성했고 지난해 이를 집대성한 책 ‘영혼과 물질’을 펴냈다. “우리는 변증법적 관계예요. 전 춤을 못 추지만 하용부의 춤을 보고 그 원리를 깨달았어요. 호흡의 원리도 깨쳤고 연극에 적용했죠. 그런데 정작 하용부는 그걸 몰라. 할배 모방춤이거든. 나는 현상에서 개념을 발견하고 이걸 하용부에게 다시 넣어준 거지. 그냥 춤꾼이던 그가 (나 덕분에) 창조적 아티스트가 된 거야. 하하.”(이 씨) 하 씨는 다섯 살 때부터 할아버지 하보경 옹(중요무형문화재 제68호 밀양백중놀이 예능보유자·1997년 별세)에게서 춤을 배웠다. “맞아요. 사람들에게 ‘이윤택이 하용부의 스승’이라고 합니다. 그를 못 만났으면 춤이나 추고 (인간)문화재나 되려고 했겠죠. 한번은 그가 제 춤을 보더니 ‘하 선생, 허리가 너무 구부정해. 허리를 펴야지’ 하는 거예요. 제가 춤을 일흔이 넘은 할아버지께 배웠으니 자세가 저도 모르게 노인처럼 구부정했던 거죠. 춤에 앞서 신체의 개념으로 보니까 제 춤이 이해가 되더라고요.” 하 씨는 이 씨가 연출한 작품 대부분의 안무를 맡았고 ‘오구’, ‘햄릿’ 등 주요 작품에는 배우로도 출연했다. 하 씨의 춤 공연에는 이 씨가 적극적인 조언자 역할을 했다. 2009년 초 프랑스 파리의 ‘상상축제’에 초청된 하 씨가 바스티유 오페라원형극장에서 단독 공연을 앞두고 리허설을 할 때도 그랬다. “하용부가 무대에서 춤을 다 춘 다음 처음에 앉아 있던 의자로 다시 돌아가 앉더라고요. 그래서 ‘그건 우리 방식이 아니다’고 그랬어요. ‘객석으로 나가 관객에서 손을 내밀라’고.” 하 씨는 이 말대로 객석으로 내려가 할머니 한 분을 일으켜 함께 춤을 췄다. 기립박수가 쏟아졌고 현지 신문들은 호평을 쏟아냈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한국문화는 ‘풀이’라고 했어요. 우리 문화는 풀어내는 것이지 완결성이 아니라는 건데 이게 정말 맞거든. 무대에서 풀어낸 걸 객석에 안겨주니까 감동받는 거지. 그게 바로 소통이라니까요.”(이 씨) 성격적으로도 두 사람은 서로 보완하는 관계다. “이윤택은 성격이 ‘지랄’ 같고 저는 이 선생 때문에 화난 사람들을 달래는 역할을 하다 보니 외부 사람들이 ‘하용부는 좋은 사람, 이윤택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죠. 사실은 아니에요. 배우와 스태프에게 제가 그럽니다. ‘이윤택은 욕을 하면서도 너희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다. 나는 책임 못 진다’고.” 2008년 밀양연극촌에서 독립해 ‘밀양전통예술촌’을 운영하던 하 씨는 지난해 이 씨의 부탁으로 다시 연극촌 촌장을 맡았다. “우리는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이죠. 티격태격하더라도 결국은 평생 같이 갈 겁니다. 하하.”(하 씨) 동아일보 밀양=김성규 기자 --> 기사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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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28
  • 권오춘 국어고전문화원 이사장의 양평 한옥 초은당
    다섯 번 옻칠한 대청… 그 위에서 사뿐사뿐 선비춤 드디어 초은당에 간다. 여러 자리에서 여러 입으로 분분하게 소문이 나부꼈던 집이다. 옻칠을 아홉 차례나 하면서 돈을 종이처럼 처발랐다느니, 한강 이남의 경복궁이라느니, 부석사 무량수전의 살림집 버전이라느니! 과격하고 선정적인 소문들이었다. 금강송을 켜 옻칠한 대문 앞에 서니 얼굴에 잔뜩 웃음을 문 주인이 고무신 발로 뛰어나온다. 신만 고무신이 아니다. 명주 누비 바지저고리에 역시 솜 두고 누빈 조끼를 입었다. 지난해 파주 헤이리의 한 축제에서 그가 추는 선비춤을 구경한 적 있다. 한옥에 한복 입고 살면서 선비춤을 추는 사람. 신명 많고, 입담 좋고, 생각 굳은 이 집 주인 권오춘(61) 국어고전문화원 이사장이다. 그는 지금 전통문화의 르네상스를 위해 앞장서서 달리는 중이다. 소득 3만 달러가 되면 다들 전통정신을 찾을 수밖에 없을 텐데 막상 한옥과 한복과 한식과 전통공예가 다 사라지면 큰일 날 일 아니냐며 자신의 삶으로 철저하게 한국인의 문화를 지키겠노라고 선언한 사람이다. 먼저 집 이야기부터! 초은당이 앉은 곳은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 야트막한 언덕이다. 눈앞에 북한강 줄기가 펼쳐지고 뒤로는 둥두렷한 산이 막아서 있다. 좌우로는 거인의 두 팔인 양 산줄기가 흘러내려와 집터를 포근하게 껴안는 형국이다. 풍수를 모르는 까막눈의 입에서도 ‘배산임수’ ‘좌청룡우백호’ 같은 말이 절로 튀어나올 길지다. 원래 이 집은 문화재 전문위원이기도 한, 홍근옥 명지대 공예과 교수가 박물관을 할 요량으로 맘먹고 지었다고 한다. 도집례(都執禮·의례를 맡아보는 사람)는 봉정사 극락전, 백제문화단지 같은 국보급 문화재를 복원했던 인간문화재 최기영 선생이 맡았다. 그런데 짓는 중에 그만 외환위기가 터졌다. 급히 새 주인을 물색하던 홍 교수와 마땅한 한옥을 찾고 있던 권 이사장이 만났다. “이 집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계약하자고 했어요. 당시 집사람은 미국에 머물던 중이었는데 전화로 상의했더니 한옥에 살겠거든 이혼하자고 하데요. 금방 설득할 일은 아니다 싶어 일단 계약부터 했지요.” 그때가 2004년이었다. 당시 사지 말라던 부인이 이젠 팔지 말라고 한다니, 그의 설득 작업이 효과가 있었던 듯싶다. 그러나 아직 100% 성공은 아니다. 부인은 잠실의 아파트에 살고 양평집엔 사랑주인만 일주일에 삼사 일씩 혼자 내려와 맥반석 구들 위로 군불 때면서 살고 있다. 한옥이 현대 한국인에게, 특히 살림을 맡은 안주인에게 얼마나 천대 받고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현실이다. “한옥에 살면 불편한 줄 알지만 막상 익숙해지면 심신이 아주 편안해져요. 이렇게 과학적이고 인간을 깊이 이해하는 건축양식이 있었던가 새삼 놀랍니다. 남방문화인 마루와 북방문화인 구들이 만난 것도 그렇지만, 창호지·문얼굴·창호의 치수 같은 것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휴머니즘에 입각해 있는지요. 한옥은 우주 철학을 포괄하는 집이에요. 추녀의 원·기둥과 마루와 방 마루의 네모, 지붕의 세모가 합해 원방각(圓方角) 천지인(天地人) 철학을 품고 있습니다. 한복 또한 마찬가지예요. 집과 옷이 우주 원리에 두루 부합해요. 사람도 소우주니 집에 들어앉으면 성품이 활달해질 수밖에! 그러면서 또 언행은 신중하게 만들거든요.” 초은당 지붕은 여느 한옥과는 다르다. 처마가 길게 빠져나와 기와지붕이 내려앉은 모습이 새가 비상하는 형상이되 이건 까막까치 같은 잡새의 날개가 아니다. 적어도 독수리나 봉황쯤은 될 듯하다. “처마가 긴 것은 고려시대 건축양식이랍니다. 남성적이고 우람하지요.” 그 한옥을 그냥 두지 않고 그는 공들여 옻칠을 했다. 그냥 옻칠 정도가 아니라 인간문화재 옻칠장인 정수화씨를 초빙해 기둥엔 아홉 번, 바닥엔 다섯 번씩 덧발랐다. 초은당은 그래서 마루장도 기둥도 빛을 반사하는 거울면이 됐다. “옻칠은 세계에 자랑할 우리 보물입니다. 옻칠을 제대로 하면 불에 타지도 않고 원적외선이라는 것이 엄청나게 나온답니다. 옻나무로 차를 달여 먹으면 조기엔 암도 치료할 수 있대요. 유리컵에 우유를 담아놓으면 하루를 넘기지 못하지만 옻칠한 나무 컵에 우유를 담으면 일주일을 가도 상하지 않는 걸 내 눈으로 봤으니깐요.” 그의 한옥과 한복 예찬은 기운차고 재미있고 격조 있고 끝 간 데를 모른다. 그는 안동권씨 부정공파 35대 손으로 경북 안동에서 나고 자랐다. 태생적으로 선비정신이 몸에 밴 사람이다. 10여 년 전에는 하회 마을 인근 구담 마을에 60칸짜리 ‘구담정사’를 장만해 어머니를 모셨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이곳 양평의 북한강 물길은 안동의 낙동강까지 닿았었다. 배를 타고 그렇게 흘러간 기록이 여기저기 보인다. 지금 여기 양수리 북한강가 초은당 앞을 맴도는 전통문화의 물길이 안동 하회에 이르러 구담정사까지 흘러가기를 그는 꿈꾼다. 초은당은 본채 27칸, 별채 3칸 해서 모두 서른 칸의 집이다. 깔고 앉은 대지는 3300㎡(1000평). 마당 초입에는 들어서는 사람을 향해 절을 하는 형상의 향나무를 심었다. 또 봉화에서 가져온 금강송을 심었고, 마당으로 올라서는 계단은 문경에서 실어나른 목화문석으로 만들었다. 들여다보면 돌 속에 목화 송이가 툭툭 벙근다. 대문 앞엔 한쪽엔 초(招), 다른 쪽엔 은(隱)이라고 새겨진 와당을 박아넣었다. 초은은 숨어있는 사람을 부른다는 의미의 당호이고, 집주인 권오춘의 호다. 한복 입고 한옥에 사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몇 해 전 그는 영남춤의 명인인 박경랑 선생을 모셔와 선비춤을 배웠다. 손이 오면 거울같이 윤나는 대청에서 그는 너울너울 선비춤을 춘다. 지난가을엔 바깥 담을 새로 둘렀다. 거기엔 검은 빛이 감도는 보령 오석을 썼다. “산성을 쌓는 방식으로 담을 쌓았어요. 담장 위에 늘어놓은 흙인형은 인연 깊은 도예가 박종식이 만들어서 구운 겁니다. 인간의 벼라별 동작이 다 담겨 있지요. 봄이 오면 바닥에 조선꽃들을 심을 겁니다. 바닥에 깔린 벽돌도 박종식의 작품입니다. 자세히 들여다보세요.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게 모두 한국 전통 문양을 벽돌 위에 복원한 겁니다.” 지면이 모자라 그의 한국문화 사랑을 일일이 기록하지 못함이 아쉬울 뿐이다. 글=김서령 칼럼니스트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 중앙일보 기사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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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28
  • 박경랑의 코리언 팝 클래식 댄스 - 배학수교수의 무용평론
    --> 박경랑과 e-춤터 다음카페 가기 [예술부산 통권 78호 2011년 12월 35쪽] 1981년 테네 가수 플라시도 도밍고는 대중 가수 존 덴버와 함께 아마도 사랑’(Perhaps Love)을 불렀다. “아마도 사랑은 폭풍우로보터 안식을 주는 쉼터와 같을 거예요.” 대중음악과 고전음악을 섞을 때 잘 못하면 둘의 결점만 모여 유치하면서도 지루한 작품이 되어버리는데 도밍고와 덴버는 둘의 장점을 살려 편하면서도 품위있는 노래를 만들었다. 그날 박경랑도 그랬다. 그녀는 한국의 고전무용에 대중 무용적 요소를 잘 섞어 전통미를 간직하면서도 즐거운 작품을 만들었던 것이다. 박경랑은 춤을 세 개 보여 주었는데 고전과 대중의 화학적 결합을 성취한 작품은 두 번째 작품 ‘교방청 춤’이었다. 이 작품은 굴신(屈伸)과 상허하실(上虛下實)이란 한국 고전 무용의 전통적 기법을 그대로 사용한다. 굴신이란 몸을 굽혔다 펴는 업-다운이며, 상허하실이란 단전호흡으로 하체를 안정시키며 상체를 자유롭게 움직이는 자세이다. 교방청춤은 모든 동작을 고전적 방식으로 수행하면서, 고전무용에서는 드문 직선의 활달함과 세밀한 잔놀음, 그리고 강력한 클라이맥스를 섞어 관객에게 새로운 감흥을 주었다. 양팔을 일직선으로 죽 펴는 직선의 사위는 매우 시원한 느낌을 주며, 작은 장식적 움직임이 동작에 자주 가미되어 전체적으로 화려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절정의 장면은 박경랑 교방청춤의 가장 큰 특징이다. 작품의 종반 그녀는 지구가 태양을 돌듯이 자전하면서 공전한다. 느린 속도로 진행을 하다가 빠른 속도로 자전과 공전을 섞으면 그 동작의 박력과 순환이 주는 아름다움 때문에 관객들은 삭이고 있던 감정을 터트리면서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된다. 박경랑은 교방청 춤에서 고전무용의 중후함에 시원함과 화려함, 그리고 절정의 회전을 섞어 고전과 대중의 중간이란 새로운 스타일의 무용 세계를 확립하였다. 이날 함께 출연한 이생강과 백인영도 많은 박수를 받았다. 이생강은 소금, 피리, 대금을 들고 나와 각각의 음색을 소개하였으며 목포의 눈물과 대니보이를 그 악기로 연주하였고, 백인영은 아쟁으로 베사메무초를 연주했다. 그렇게함으로써 그 두 분은 국악기로 서양음악을 연주하면 완전히 새로운 분위기가 난다는 점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양악 연주에 시간을 너무 많이 할애하여 국악 작품을 제대로 듣고 싶은 관객은 다소 실망이었을 것이다. 파페라(popera)는 대중음악(pop)의 형식으로 연주하는 오페라이거나 오페라 형식으로 연주하는 팝이다. 박경랑의 춤은 대중 무용 형식으로 추는 고전무용이다. 클래식과 대중음악에 대해 어느 쪽이 더 좋은지 말할 수 없듯이, 박경랑의 팝 클래식도 정통 고전무용보다 수준이 떨어진다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하나의 독자적 스타일인 것이다. (2011.11.11. 부산 국립국악원 연악당) --> 경성대학교 배학수교수 네이버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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