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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스트링사운드의 혼자서 즐기는 다양한 전통악기 합주 ‘지금풍류’, 체험해 보세요~
혼자서도 한국전통음악의 합주를 경험할 수 있는 슈퍼스트링사운드의 온라인 플랫폼 ‘지금풍류(art-atm.com)’가 새로운 디자인과 콘텐츠를 보강하여 ‘v2.0’으로 업그레이드됐다. ‘지금풍류’ 플랫폼에 회원가입을 하면 모든 콘텐츠를 무료로 사용할 수 있으며, 플랫폼을 통해 전통음악을 재생할 때 악기별 음량 제어 등 다양한 기능을 사용할 수 있다. 사용자는 자신이 연주하는 악기를 제외한 다른 악기들만 재생함으로써 혼자서도 합주 연습이 언제 어디서나 가능하다. ▶ '지금풍류' 방문하기 2년 연속 한국문화정보원의 공공저작물 활용기업 지원사업에 선정된 ‘지금풍류’는 국립국악원의 공공저작물인 국악기 디지털 음원을 활용하여, 실시간으로 사용자가 직접 연주할 수 있는 기능을 추가했다. 이번에 추가된 실시간 연주 기능에서는 전통 국악기 중 타악기인 ‘장구’와 ‘꽹과리’를 선택할 수 있고, 사용자는 ‘지금풍류’에서 제공하는 전통음악 콘텐츠를 감상하면서, 동시에 터치 패드를 통해 한국전통음악의 ‘장단’을 직접 연주해 볼 수 있다. ‘지금풍류’에서 현재 서비스하는 음원으로는 줄풍류(현악영산회상, 평조회상)・뒷풍류(천년만세)・취타풍류・사물놀이가 있으며, 추가적으로 국악방송과 국립국악원의 민요・국악동요・초등단소・소금 등의 음원을 서비스할 예정이다. ‘지금풍류’는 2017년 안드로이드 앱으로 시작해 3년간의 개발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으며, 2019년 제7회 문화데이터 활용 경진대회에서 대상(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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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인 프로필 사용 (신규등록, 수정신청) 설명입니다.
안녕하세요. 국악의 대중화와 세계화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국악포털 아리랑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국악포털 아리랑에서는 국악에 관심있으신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는 국악인의 프로필을 꾸준히 만들고 있으며 전통의 맥을 잇기 위해 애쓰시는 우리의 국악인을 소개해 널리 알리고 있습니다. 본 국악인프로필은 국악인 측에서 직접 제공한 자료 또는 공개된 정보를 토대로 정리한 내용입니다. ★ 신규 프로필등록, 삭제, 수정, 첨부할 내용이 있으시면, 국악포털 아리랑의 공식 이메일 arirang@sori.me 로 보내 주시거나 혹은 PC버전 맨 하단에 있는 ▶ 프로필 등록 신청 (모바일에서는 ▶프로필 등록 신청) 을 이용해 주시면 확인 후 즉시 업로드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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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경연대회] 2023 제13회 농화전국국악경연대회 신청안내 (접수기간 6월 12일 ~ 7월 12일)
- 1. 대회명 : 제13회 농화전국국악경연대회2. 장소 : 광주북구문화센터 공연장3. 일시 : 2023년 7월 15일 (토) ~ 7월 16(일) 2일간4. 접수기간 : 6월 12일(월 ) ~ 7월 12일(화) / 오후5시 마감 5. 문의전화 : 062-525-6521 / 팩스 062-523-65216. 대회정보 더보기 ▶ 신청서 다운로드 (공지사항) 7. 대회 목적 : 북춤 명인 농화 박관용 선생 추모사업과 지역의 문화예술 자원 개발 및 전통예술의 계승 발전, 신진국악인의 발굴 및 저변 확대로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아시아문화 중심 도시로서 역할을 하고자 함.8. 주관 / 주최 : (사)아시아문화예술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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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경연대회] 2023 제13회 농화전국국악경연대회 신청안내 (접수기간 6월 12일 ~ 7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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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 ‘진도 아리랑’, 전라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
- 전라남도는 7월 21일 ‘진도 아리랑’과 ‘고흥 마동별신제와 매구’를 전남무형문화재로 지정, 체계적 보존과 효율적인 활용에 나설 계획이라고 밝혔다. 별신제는 마을 수호신에게 드리는 제사이고, 매구는 풍년을 비는 민속행사(농악)다. 진도아리랑(전남무형문화재 제64호)은 강원 정선아리랑, 경남 밀양아리랑과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3대 아리랑 중 하나다. 아리랑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2년 12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데 이어 2015년 9월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여기에 각 지역별 문화적 정체성을 지닌 아리랑을 시·도 무형문화재로 지정토록 권고함에 따라 전남도가 이번에 무형문화재로 지정하게 된 것이다.진도 아리랑은 남도 지방의 전통 음악선율인 ‘육자배기’를 기본으로 한국의 민요 및 남도민요의 정수를 보여준다. 전통성과 예술성이 높아 보존전승가치를 인정받았다.고흥 마동별신제와 매구(도 무형문화재 제63호)는 약 200여 년 전부터 전승된 고흥의 민속문화다. 마을 문서인 ‘별신제 절의’, ‘교자계안’에서 확인돼 그 연원과 역사성을 알 수 있다.다른 지역에 비해 외부의 농악이 들어오지 않아 비교적 문화유산의 전형(典型)이 잘 전승 보존돼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심재명 전남도 문화자원과장은 “문화유산의 체계적인 보존과 효율적인 활용을 위해 다양한 무형문화재의 신규 종목을 발굴·지정하는 등 보호 대상을 확대할 방침”이라고 말했다.전남도는 또 ‘보성 용연정사’, ‘호남 여성농악-포장걸립-’ 등을 문화재자료와 무형문화재로 지정(인정)을 예고했다. 앞으로 예고기간인 30일 동안 의견을 수렴한 뒤 문화재위원회 최종 심의를 거쳐 지정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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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 ‘진도 아리랑’, 전라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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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요에 빠져 엄마 몰래 한국행…'멕시코 소리꾼' 난시 - 멕시코서 처음 민요 무대 선보여
- '경기민요 전수자' 난시 카스트로, 멕시코서 처음 민요 무대 선보여 "민요 부를 때 행복…한국 정체성 담은 민요, 더 널리 알려지길" 2018년의 어느 날, 멕시코 멕시코시티에 살던 난시 카스트로는 여느 때처럼 회사에 간다며 집을 나섰다. 그러나 난시가 간 곳은 회사가 아닌 공항이었다. 친언니 집에 미리 조금씩 챙겨놓은 가방을 들고 그길로 어머니 몰래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 '난시 카스트로' 인스타그램 한국 민요를 공부하겠다며 그렇게 무모하게 한국행에 나선 카스트로는 4년 만에 어엿한 '경기민요 전수자'라는 칭호를 달고 멕시코를 찾았고, 처음으로 엄마와 멕시코 친구들 앞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한국 민요를 선보였다. "공연 끝나고 엄마가 무대로 올라오셔서 저를 꼭 안아주시면서 "너무 잘했다"고 하셨어요. 행복했습니다." '멕시코 소리꾼' 난시(28)는 지난 3일(현지시간) 멕시코시티 메트로폴리탄 극장에서 열린 한국·멕시코 수교 60주년 기념 콘서트에서 가장 먼저 무대에 올라 양국 관객 앞에서 '노랫가락' '창부타령' '아리랑' 등을 불렀다. 공연 전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유창한 한국말로 "멕시코에서, 그리고 엄마 앞에선 처음 하는 공연이라 너무 떨린다"고 했던 난시는 공연 후 "관객분들이 큰 박수로 맞아주고 내내 응원해주셔서 잘 끝낼 수 있었다"고 기뻐했다. ▶ 해당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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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요에 빠져 엄마 몰래 한국행…'멕시코 소리꾼' 난시 - 멕시코서 처음 민요 무대 선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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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해보라 - '사랑도 매화' 디지털 앨범발매 (긴아리랑, 매화타령)
- 만13살 소녀, '보라'는 현재의 음악이 아니라, 먼 과거의 노래에 취해 그 길로 민요를 시작했다. 넘치는 매력을 가진 젊은 여성, 동시에 5대5 가르마를 탄 쪽진 머리와 한복이 유난히도 잘 어울리는 경기민요 소리꾼, '노래해보라'! 그녀는MBC 전주대사습놀이 학생부, 명창부에서 각각 장원, 차하를 수상하였으며, 2011년21세기 한국음악 프로젝트 창작국악경연대회 (전통소리 그룹 '절대歌인' 멤버) 금상수상, 한국음악실연자연합회 2021 소형공연 지원사업 선정 - 노래해보라 '봄노래' 유튜브 공연, 2015년 제2회 부여 백제 전국국악경연대회 일반부 민요 대상을 수상한 바 있는 실력 있는 소리꾼이다. ‘노래해보라’라는 이름으로 활동중인 김보라는 [사랑도 매화]앨범을 발매하며 “노래는 인생의 한 단면을 이야기합니다. 인생 전부가 희망과 사랑으로 채워질 수는 없겠지만, 제 노래를 듣는 누군가의 인생이 잠시나마 희망이고 사랑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전했다. 거창하고 어렵게 느껴지는 민요의 이미지를 벗어나, 누구나 공감하고 즐길 수 있는 음악으로, 주변의 풍경, 생각, 이야기를 담아 ‘노래해보라’의 목소리로 민요를 전하고자 하는 그녀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겼다. [사랑도 매화] 앨범엔 총 2곡이 수록되었다. 01 긴아리랑 (편곡: 송지훈) 오래전부터 경기민요의 백미로 손꼽히는 노래이다. 사랑은 그렇게도 우리를 옛날부터 지금까지 슬퍼하게 했고, 기쁘게 했으며 살아오게 했다. 긴 그리움 끝에 느껴지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을 긴 아리랑으로 노래해 보았다. 02 매화타령 (편곡: 송지훈) 모두가 움츠러드는 겨울, 매화는 가장 먼저 꽃을 피워낸다. 그 꽃은 온통 하얀 설중에 홀로 처연히 붉다. 먼 옛날의 누군가는 그 매화를 보고, 겨울을 혼자 견디는 마음을 사랑에 빗대었다. 그 마음을 목소리에 담고자 했다. 아울러 전자피아노와 휘슬연주의 따뜻하고 아련한 소리를 채웠다. '노래해보라'의 본명은 '김보라'이다. 평범한 '김보라'에서 '노래해보라'로 거듭나기까지 그녀는 자신의 이름에 수많은 의미와 목표를 담았다. 첫째, 경기민요 소리꾼으로 노래하는 '보라', '노래해보라', 둘째, 자신의 무대에서 관객과 함께 노래해보자는 권유의 의미로 '노래해보라'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눈보라, 물보라처럼 '보라' 자신이 노래라는 매개체로 강력하게 응축되어 있다, 산산이 아름답게 흩어져 '세상을 노래로 널리 반짝이고 싶다'는 의지의 '노래해보라'이다. '노래해보라'가 직접 작사, 작곡, 편곡한 곡들로 구성되어 2014년 첫 발매했던 미니 앨범 [여기도 하나]에 이어, 8년만에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 솔로 앨범[사랑도 매화]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전한다. ‘노래해보라’는 솔로 앨범 발매 이후 6월, 자작곡인 담긴 싱글음반 발매를 앞두고 있으며, 6월9일-11일, 단재 신채호를 그린 마당극패 우금치의 마당극 '하시하지' 무궁화역으로 출연 예정이다. ‘노래해보라’(김보라)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음악과 성악(민요)전공 학사 -제21회 전주대사습놀이 학생부 민요 장원-제37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민요 차하 -21c 한국음악프로젝트 금상 (절대가인/떡먹고 엿먹고)-국립극장 예술단 미르 단원 역임-미니앨범 '여기도 하나' 발매 -제2회 부여 백제 전국국악경연대회 일반부 민요 대상 -국악한마당, FM99.1 국악방송 꿈꾸는 아리랑 출연 등 -현재 창작소리그룹 절대가인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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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해보라 - '사랑도 매화' 디지털 앨범발매 (긴아리랑, 매화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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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투리에 따라 달라지는 한국의 민요
- 故 최종민교수 (철학박사, 국립극장예술진흥회 회장, 동국대문화예술대학원 교수) 1. 언어가 다르면 노래가 달라진다. 15세기 한국의 음악문화는 대단히 높은 수준으로 발달했었다. 편경 편종과 같은 악기를 만들 수 있게 되었고 중국음악어법의 문묘제례악이나 한국음악어법의 종묘제례악악을 작곡하였는데 그 음악이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음악학도 발달하여 그 당시의 음악이론을 집대성한 악학궤범(樂學軌範)같은 책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 악학궤범에 보면 노래에 대하여 “歌所以永言而和於律”이라고 간단히 언급한 구절이 있다. 이 말은 “노래란 말을 길게 하여 음율에 맞춘것이다”로 번역할 수 있다. 말이 노래가 된다는 것이다. 하긴 인도노래는 인도말을 길게 하여 인도음율에 맞춘것이고 중국노래는 중국말을 길게 하여 중국음율에 맞춘것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렇다고 보아야 한다. 같은 논리로 우리나라 노래는 한국말을 길게 하여 우리나라의 음율에 맞춘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말이 노래가 되는 과정을 검증해 보자. 본격적인 노래가 아니면서 노래의 요소가 많은 언어현상을 찾아보자. 옛날 어머니나 할머니들은 아기를 재울때 “자장자장 자장자장 우리아가 잘도 잔다. 멍멍개야 짓지마라 우리아가 잘도잔다.”와 같이 읊조리면서 아기를 재웠다. 그런 소리에는 장단도 있고 곡조도 있으니까 노래의 요소가 많다고 할 수 있다. 지금도 어린학생들이 구구단을 외울때 “이이는 사 이삼은 육 이사 팔 이구 십팔”하고 외운다. 그 소리에도 장단과 곡조가 있다. 상인들이 외치는 소리에도 곡조가 있고 농부들이 소를 몰면서 하는 소리에도 곡조가 있다. 이런 소리들이 노래의 바탕이 된다고 보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우리노래의 모습은 어떨까?. 간단한 것으로는 ‘새야새야’와 같이 3음으로 되는 것이 있다. 완전4도 위에 장2도를 쌓아 올려 만들어지는 이 3음계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새야새야’의 곡조가 된다. 그런데 그 곡조도 처음을 하행으로 시작하여 “솔레라솔- 라솔레레- 라레라라- 라솔레레-”와 같이 하는 경우도 있고 처음을 상행으로 시작하여 “라레라라- 라솔레레- 솔레라솔- 라솔레레-”와 같이 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 두가지 곡조가 다 쓰인다. 또 가사를 “달아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로 해도 마찬가지이다. 말을 읊조리듯이 하여 만들어지는 간단한 민요는 3음만으로도 노래가 된다. 그런데 이 ‘새야새야’는 박자가 5박자이다. 서양음악에서는 잘 쓰이지 않는 5박자가 우리노래에서는 가장 간단한 민요에도 사용되고 있다. 실제 우리나라의 노래에는 5박자가 많이 쓰인다. 농촌에서 모를 심을때 부르는 모심기 노래에도 “심어주게- 심어주게- 심-어주- 게---- 오-종조옹 줄-모르을 심-어주- 게---- ”와 같이 5박자로 부른다. 우리말이 석자나 넉자로 이루어지는 말이 많기 때문에 그 석자나 넉자를 우리가 말하는 식으로 읊조리면 5박자가 될 때에 편하고 자연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5박자를 늘이면 8박자가 된다. 서양음악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5박자와 8박자가 우리음악에서는 아주 많이 사용하는 박자가 되어 있다. ‘시조’의 초장은 박자가 5․8․8․5․8 이니까 5박과 8박이 섞여 있는 박자인데 경기민요인 ‘노랫가락’도 그런식으로 되어 있다. ‘노랫가락’은 ‘시조’와 같은 3장형식의 시를 가사로 하는 노래인데 “청-산리- 벽게-수-야-- 수이---감을- 자랑-마- 라---- ” 와 같이 5박과 8박을 섞어서 박자로 쓰고 있다. 현행의 시조나 가곡이 다 5박구조와 8박구조로 되어있고 풍류로 연주하는 영산회상의 상영산이나 중영산 세령산이 다 5박구조이다. 많은 궁중음악이나 고려때 가요로 알려진 ‘가시리’ ‘사모곡’ ‘서경별곡’ 청산별곡‘ 같은 노래도 다 5박구조와 8박구조로 되어 있다. 서양음악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 5박자와 8박자가 우리음악에서는 아주 흔하게 쓰이고 있다. 우리말이 그런 박자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또 우리말에는 사투리가 있다. 음악이라는 두 글자도 전라도에서는 “으마악-”과 같이 발음하고 경상도에서는 “어막”과 같이 발음한다. 전라도의 사투리는 소리를 뒤로 밀면서 발음하기 때문에 소리의 세(勢)가 뒤쪽으로 계속 진행할려는 경향을 갖는데 반하여 경상도 사투리는 뒤가 끊어지면서 앞쪽에 액쎈트가 가게 된다. 그러면 두 지방의 민요도 그와 같이 발달하게 된다. 전라도 민요는 선율이 계속 진행할려는 경향을 갖기 때문에 ‘진도아리랑’의 첫부분이 “무운경- 새재애느은 웬 고오오갠가 - ” 하면서 뒤를 떨면서 지속하고 있다. 한편 경상도 민요는 “어막”이라는 말과 같이 앞에 액쎈트를 주면서 뒤는 곧 끊어지게 소리내기 때문에 ‘밀양아리랑’의 경우 “날쫌보소오 날쫌보소오”와 같이 부르게 된다. 사투리의 억양이 그대로 민요에 반영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사투리에 따라서 민요의 구조나 특징이 달라지기 때문에 전라도민요 경상도민요 경기민요등의 갈래가 형성되게 되고 민요권이라는 것이 성립하게 된다. 우리나라는 땅덩이는 그리 크기 않지만 각 지방마다 독특한 사투리가 있어서 그와 같은 맥락의 특징있는 민요가 많이 발달 하였다. 내가 채집해 본 바로 우리나라의 민요는 제주도 한 도에서 300곡 이상이 나올 정도로 많은 민요가 발달하였다. 나는 그 중 170곡 정도를 골라 악보를 낸 적이 있다. 악학궤범의 언급대로 노래란 말을 바탕으로 만들어 지는 것이다. 말이 다르면 노래가 달라진다. 인도에는 인도식 노래가 중국에는 중국식 노래가 발달하는 것도 다 말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안에서도 사투리가 다르면 다른 특징의 노래가 발달하지 않았던가?. 앞으로도 우리말을 절묘하게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노래문화를 창출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 더 많은 내용 자세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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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투리에 따라 달라지는 한국의 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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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회 세계 한국 국악경연대회 정보
- 대회명 : 제12회 세계한국국악경연대회 한국 국악인들과 전세계에 있는 재외동포 후세들에게 한민족의 전통문화 예술의 함양된 실력을 평가 받고, 인증 받는 계기를 마련해 줌으로 조국문화의 긍지를 갖게 해주며, 세계문화의 중심인 뉴욕에서 세계인들에게 우리의 문화를 알리는 데 그 목적이 있다. --> 자세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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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회 세계 한국 국악경연대회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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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전국국악경연대회 안내 (5월21일까지 접수)
- 대회명 : 제10회 전국국악경연대회 (전국국악대전) ‘전국국악대전’은 국악예술인들의 총체적 혼과 노력의 결과를 경주하는 국악의 종합대회로 국악의 올바른 전승과 체계적 계승발전에 중추적 역할을 수행할 우수 국악인의 선발 및 등용을 목적으로 실시하고 있습니다. --> 경연대회 정보 자세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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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전국국악경연대회 안내 (5월21일까지 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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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4일까지 정선읍 아라리공원 일원에서 2012 '정선아리랑제'
- 2012정선아리랑제의 기본프로그램 윤곽이 나왔다. (사)정선아리랑제위원회(위원장 이종영)는 오는 10월 1일부터 4일까지 정선읍 아라리공원 일원에서 ‘우리모두 흥겹게, 흥얼∼흥얼(興all∼興all)’을 주제로 2012정선아리랑제를 개최한다. 올해 아리랑제는 추석연휴와 정선5일장이 중복되는 기간인 점을 감안해 지역주민과 관광객들의 참여프로그램을 대폭 확대할 계획이다. 주요일정은 10월 1일 정선군 남면 낙동리 칠현제례와 아리랑 군민화합 콩쿠르를 시작으로 2일 오후 7시부터 아라리공원둔치 특설무대에서 개막식이 열린다. 이어 정선사투리 골든벨, 한시백일장, 삼베길쌈재현·전시행사가 3일 공설운동장과 아라리촌 일원에서 진행되며 4일 오후 6시부터 폐막식을 갖는다. --> 해당기사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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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4일까지 정선읍 아라리공원 일원에서 2012 '정선아리랑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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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탄압 속 불려진 '인천 아리랑' 발견
- 허경진 연세대 국문학과 교수 1894년 출판'신찬 조선회화'에 실려 … 민족 限 해방구 역할 '인천아리랑'은 인천출신 국문학자 허경진(연세대 국문과) 교수가 2000년 미국 하버드대학교 한국연구소 방문학자로 1년 동안 머물던 중 한국 고서와 관련된 자료를 조사하던 중 우연히 발견됐다. 허 교수는 '인천 아리랑<전문>'이 실려있던 '신찬 조선회화' 책자를 손에 든 채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신찬 조선회화'는 관립 한성고등학교 교장을 지낸 홍석현씨가 1894년 일본 도쿄 하쿠분간(博文館)에서 출판한 조선어 회화책이다. 책에 실려있던 '인천 아리랑'은 1883년 강제 개항 직후 일본인이 득세하던 조선인의 한이 서린 노래다. 그는 "그동안 '아리랑' 가사가 기록된 것은 1896년 미국 선교사인 호머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가 기록한 것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졌었다"며 "하지만 당시 내가 발견한 1894년에 출판된 '신찬 조선회화'라는 책에는 그보다 2년이 빠르게 '아리랑' 가사가 기록돼 있었다"며 차분히 그 당시의 기억을 거슬러 올라갔다. 허 교수를 더 흥분시킨 것은 인천 출신 학자로서 가장 오래된 아리랑의 발견을 고향에 선물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 해당기사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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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탄압 속 불려진 '인천 아리랑'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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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시 용지문화공원에서 광복절 경축음악회 ‘아! 아리랑...’ 성황리에 개최
- 창원시에 광복을 기념하는 노랫소리가 울려퍼졌다. 창원시 용지문화공원에서 광복 67주년을 기념하는 ‘광복절 경축음악회 아! 아리랑...’이 개최되었다. 14일 광복 전야에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많은 시민들이 참석해 뜨거운 열기를 느낄 수 있었던 본 공연은 알찬 프로그램 구성으로도 시민들의 많은 호응을 얻었다. 시립무용단의 ‘축하무’로 막을 연 음악회는 시립교향악단의 ‘아리랑’, 심정은(바이올린)의 바이올린 협주곡 ‘아리랑’과 시립소년소녀합창단의 아리랑 모음곡으로 이어졌다. 특별히 초청된 성악가와 가수들도 눈에 띄었다. 세계적인 거장으로 불리는 바리톤 고성현, 소프라노 김영미, 국악인 김성녀가 무대에 올랐고 ‘독도는 우리땅’을 가수 마야가 불러 폭발적인 가창력을 아낌없이 무대위에서 보여줬다. 시립교향악단·시립합창단·시립무용단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마지막 무대는 안익태의 ‘한국 환상곡’으로 꾸며졌으며 공연이 모두 끝난 후 대한민국 만세 삼창과 불꽃축제가 이어졌다. --> 해당기사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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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시 용지문화공원에서 광복절 경축음악회 ‘아! 아리랑...’ 성황리에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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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8일 제10회 화순전국국악대제전 개최
- 제10회 화순 전국 국악 대제전이 하니움 문화 스포츠센터 적벽실에서 오는 18~19일 2일간 열린다. 이번 대회는 화순군(군수 홍이식)이 주최하고 화순국악진흥회(이사장 김향순) 주관으로 올해로 10번째로 개최되는 전국대회로 화순군이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지켜나가는데 모범적인 군임을 전국에 알릴 수 있는 대회이다. 화순전국국악대제전은 18일 오전 9시부터 판소리, 고법, 무용 기악 예선을 시작으로 열띤 경쟁이 펼쳐지며, 오전 11시에는 하니움문화스포츠센터 적벽실에서 대회 개회식이 열린다. 본선은 19일 오전 9시에 치러지며 시상식(오후 5시)이 시작되기 한 시간 전인 오후 4시부터는 국악특별공연을 선보일 예정이다. --> 해당뉴스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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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8일 제10회 화순전국국악대제전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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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문화예술회관, 참신한 공연예술단체 모집
- 해당기사 자세히 보기 --> www.idaegu.co.kr/new_gisa.html 대구문화예술회관(박재환 관장)이 능력 있고 참신한 공연 예술 단체를 모집한다. 대상은 대구·경북 지역의 예술단체로 공연 장르 구분 없이 클래식, 국악, 무용, 실용 음악 등 모두 가능하다. 모집 기간은 9월 14일까지며 신청서 1부와 해당 공연 자료를 시립예술단 사무실 방문 또는 우편으로 접수 하면 된다. 결과는 심사를 통해 9월 17일 이후 개별 통보 할 예정이다. 선정된 단체는 대구시립예술단의 ‘찾아가는 공연’과 ‘토요예술무대’ 등의 상시 공연에 출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며 회당 공연 실비가 지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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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문화예술회관, 참신한 공연예술단체 모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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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의 놀라운 음악재주
- 최종민 교수는 1942년 강릉 태생으로 서울대 음악대학 국악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으며 성균관 대학 동양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68년 안동교육대학 교수로 출발 강릉대, 전남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를 거쳐 남원정보국악고등학교 교장 등을 역임한 후 국립창극단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의 민속음악>, <국악의 새로운 숨결>,<민요-이렇게 가르치면 제맛이 나요>, <한국전통음악의 미학사상> 등이 있다. 故 최종민교수 (철학박사, 국립극장예술진흥회 회장, 동국대문화예술대학원 교수) 한국출신은 음악을 잘 한다. 보통사람들도 노래를 잘 하지만 음악을 전공하는 사람들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음악가가 많다. 장한나 같은 경우는 우리나라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미국으로 건너갔는데 얼마 안 되어 세계적인 로스트로포비치 첼로 콩쿨에 나가 우승하는 영광을 안았다. , 장영주도 대단한 재능을 인정받고 세계적으로 크게 활동하고 있다. 이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출신의 음악가들이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 두각을 나타내는 경우는 얼마든지 많다. 정트리오를 비롯해서 김영욱 강동석 등의 기악분야도 그렇지만 요즘은 조수미 신영옥 홍혜경 등이 성악분야에서도 큰 성과를 거두고 있다. 작곡분야의 윤이상이나 비디오 아-트의 백남준 모두 뛰어난 한국인들이다. 서양음악을 접한 지 1세기 밖에 안 되고 본격적으로 서양음악을 공부한지 70년 정도 밖에 안 되는데 그렇게 서양음악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정말 우리민족은 음악에 놀라운 재주와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거창하게 말하면 가장 국제 경쟁력이 있는 음악재주를 우리들은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음악을 전공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우리네 대부분이 음악에 큰 재주를 타고 났다. 중국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도 음악을 잘하고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도 음악을 잘한다. 조그마한 한인교회의 성가대들도 크리스마스가 되면 메시야를 척척 하는 것이 미국에 사는 우리 동포들의 음악 실력이다. 그런데 우리민족의 이러한 음악재주에 대하여 왜 우리에게 그런 음악재주가 형성되었는가를 생각해 본 사람을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늘 노래하고 춤추며 살아왔다. 모를 심을 때에도 노래하면서 모를 심었고 김을 맬 때에도 노래하면서 김을 매었다. 농촌에서는 농사일을 하면서 노래를 불렀고 어촌에서는 배를 젓거나 그물을 치고 걷을 때에도 노래하면서 손발을 맞췄다. 노래 없이 하는 일은 거의 없을 정도로 모든 일에 노래가 불리어 졌다. 관리들이 근무하는 관아나 군대에도 악사들이 있었고 궁중에는 6세기부터 궁중악사제도가 있었다. 궁중의 모든 의례에는 반드시 음악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궁중악사의 수는 몇백 명에 이르는 것이 보통이었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생활은 온통 음악과 함께 하는 생활이었다. 생활의 내용 즉 삶의 내용을 문화라고 한다면 우리네의 문화는 온통 음악과 함께 하는 문화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왕조에서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부여의 영고나 고구려의 동맹 같은 제천대회 시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줄곧 그렇게 살아 온 것이다. 우리의 음악재주와 음악취미는 그렇게 오래 오래 지속되어 온 우리네의 생활 속에서 축적된 것이다. 갑자기 형성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체질적으로 음악을 좋아하고 음악을 잘 한다. 음악의 소질이 유전되어서 음악을 잘하고 또 생활환경이 늘 음악을 하면서 사는 환경이니까 음악을 잘 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음악가의 가정에서 태어나 음악적인 환경에서 자라는 자녀들이 음악을 전공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옛날 우리들의 생활이 온통 음악으로 뒤덮여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 모두는 요즘의 음악가정 출신처럼 음악적인 소질과 취미를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그런 소질과 취미를 살리지 못하는 환경에서 살고 있고 극히 일부만이 그 소질을 개발하여 빛을 발하고 있다. 옛날의 음악환경은 아침에 일터에 나가면 자동적으로 노래를 하게 되고 풍물을 치게 되고 가사를 만들어 부르며 일하는 환경이었다. 남도의 큰 농가에서 모라도 심는 날이면 20여명의 마을 사람들이 모여 풍물을 치면서 길꼬냉이를 부르며 마을에서 들로 나간다. 일터에서는 모를 찔 때부터 노래를 하면서 모를 찌고 모를 심을 때에도 노래를 하면서 모를 심는다. 중간에 막걸리와 참을 먹는 시간이 되면 또 한 바탕 두레풍장을 치고 논 다음에 막걸리를 마시고 참을 먹는다. 일을 다 마치고 저녁에 마을로 돌아 올 때에도 농기를 앞세우고 풍물을 치면서 들어오고 마을에 도착한 다음에도 한 바탕 놀고 나서 헤어지게 된다. 요즈음으로 따지면 생활 자체가 음악적인 환경으로 되어있는 것이다. 노래를 할 때에도 일정한 곡조로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취향대로 높은 소리로 부르기도 하고 낮은 소리로 부르기도 한다. 누가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지도 않는다. 정말 자유롭게 노래를 메기고 받아주며 일을 했던 것이다. 이처럼 늘 음악과 함께 살아 온 우리여서 그토록 음악의 재능과 취미를 타고 난 것인데 오히려 현대의 생활이 마음껏 음악을 하지 못하고 살아가도록 되어 버렸다. 그래서 한 동안은 술 마시는 기회에 젓가락으로 상 언저리를 두드리면서 노래하곤 하더니만 이제는 그런 관행도 사라지고 노래방에 가서야 노래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능동적으로 노래를 하고 여럿이 어울려 노래하기란 퍽 어렵게 되어 버렸다. 가사나 곡조를 창조적으로 만들어 가면서 부르는 것은 엄두도 못 내는 풍토가 되어버렸다. 음악을 전공하여 우리네의 음악재주를 개발하는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재능이나 기질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를 듣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도 많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민족 구성원들에게는 오랜 세월 우리의 생활에서 형성된 음악의 재주가 얼마든지 잠재해 있다. 이 재주를 갈고 닦아서 세계적인 음악가를 많이많이 길러내어야 한다. 우리는 놀라운 음악의 재주를 타고 난 민족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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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의 놀라운 음악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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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극의 스타와 판소리명창
- 창극은 스타의 산실이었다. 초창기에는 판소리로 이름 높은 명창들이 창극을 시도했기 때문에 김창환·이동백·송만갑은 그 자체 스타이고 명창이었다. 정정열까지도 명창이 스타가 된 경우이지만 오태석은 조금 달랐다. 오태석은 판소리명창으로 보다는 창극의 스타로 유명했다. 그가 출연한 춘향전(방자역)이나 수궁가(원숭이역) 등에서는 관객들이 오태석의 연기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여성국극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박귀희·김소희(햇님·달님) 같은 스타가 있었기에 가능했고 그 후의 임춘앵이나 김진진·김경수도 명창이라기 보다는 스타성으로 크게 명성을 떨쳤다. 반대로 임방울은 대단한 명창이었지만 창극에서는 스타가 되지 못한 경우이다. 하여 창극의 스타와 판소리명창은 약간 차이가 나는 개념이라는 것을 전제로 이야기를 엮어 보기로 하겠다. 1962년 국립국극단이라는 이름으로 지금의 국립창극단이 만들어 질 때에는 영화나 TV 등 새로운 공연물이 늘어나면서 판소리와 창극이 극도로 위축된 시기였다. 이 무렵 김창구를 비롯한 국립극장 관계자들이 창극과 판소리를 함께 보호 육성할 방안으로 국립창극단을 만들었다. 김연수가 초대 단장을 맡고 당시 한 참 활동하던 김소희·박초월·박귀희·김경애·김득수·강종철·김정희·남해성·박봉선·박초선·임유앵·장영찬·정권진·한농선·한승호·허희 등이 단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들 중 몇 사람에 대해서는 창극과 판소리에 공헌한 점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우선 단장을 맡았던 김연수(1907~1974)에 대한 얘기부터 해 보겠다. 김연수는 일제강점기 ‘쑥대머리’ 한 방으로 스타가 된 임방울과 쌍벽을 이루며 창극과 판소리 두 분야에 크게 공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어려서 한문을 배워 유식한 편이었고 성격이 따지기를 좋아하고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품이라 많은 일화를 남긴 사람이다. 29세의 늦은 나이에 순천의 성군수 집에서 유성준에게 수궁가를 배울 때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수궁가의 가사가 틀렸다고 우겨서 유성준이 그 곳을 떠나게 했다는 얘기가 유명하고 그 일 때문에 서울로 올라와서 조선성악연구회에 출입하게 되었다. 이 무렵 조선성악연구회에는 정정열이 있어서 창극좌를 만들어 창극을 재건하고 흥행에 성공을 거둘 때인데 김연수는 그 단체에 끼어 활동하면서 본인도 나중에 정정열처럼 창극을 각색·연출·작창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겠다는 포부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김연수는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후에도 늘 지도자의 위치에서 단체를 운영하기도 하고 판소리를 새롭게 만들어 보려 애썼는데 그 결실의 하나가 국립창극단이 출범했을 때 단장이 되어 판소리를 창극으로 각색·작창·연출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판소리도 본인의 미학에 맞게 사설과 곡조를 다시 짜서 새로운 판소리를 만들었다. 본인은 춘향가만 발표했었고 나머지는 모두 오정숙이 차례차례 완창으로 발표했는데 수궁가를 완창하기 직전 김연수는 작고하고 말았다. 오늘날 동초제 판소리라고 하는 춘향가·심청가·흥보가·수궁가 등은 오정숙이 공을 들여 퍼뜨려 전주지역을 중심으로 전국에 퍼져나가고 있는데 오정숙의 제자 이일주·조소녀·민소완(성준숙)·김소영 등이 거점이 되어 활발하게 전수하고 있다. 김연수는 토막창극을 재미있게 각색하여 무대에 올린 것으로도 유명한데 지금 그런 작품은 대부분이 전승되지 않고 있다. 판소리로 1964년 인간문화재가 되기도 했던 김연수는 판소리 작품 여러 바탕을 남겼고 많은 창극작품을 무대에 올렸던 초대 국립창극단의 단장이었다. 김소희(1917~1995)는 13~4세 때부터 소녀명창으로 당시 경성방송국에서 판소리 한 대목을 방송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1935년 콜롬비아레코드에 취입하기 위해 정정열 일행으로 일본에 갈 때는 일행이 정정열·이화중선·임방울·박록주·신숙·한성준이었으니 김소희가 최연소 10대 후반의 나이였다. 김소희는 송만갑·정정열·박동실 등에게 판소리를 배우고 가곡과 거문고·가야금·양금 등을 배워 국악전반에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무엇이든지 잘 하면서 공부하기를 좋아하여 한문과 서예를 신호열선생에게 배워 서예작품이 국전에 3년이나 입선하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 이런 학습과 경륜을 가진 김소희였기 때문에 창극과 판소리에 기여한 공적 또한 적지 않다. 해방 후 여성국극이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는 시기가 있었다. 그런데 그 기폭제가 된 것은 박귀희와 김소희가 출연한 햇님·달님이라는 작품이었다. 그 작품은 실제 박귀희와 김소희를 모델로 하여 김아부가 대본을 만든 것으로 대중들의 대단한 성원을 받았고 박귀희는 남자역할로 굉장한 스타덤에 올랐었다. 박귀희를 실제 남자로 착각하고 사모하는 여성들이 줄을 이어 찾아다닐 정도로 유명했었다. 그처럼 여성국극 붐을 만들었던 김소희는 그 후 국립창극단의 여러 창극작품을 작곡하는 작창을 맡아 하기도 했다. 김소희가 한 일은 여러 방면에 걸쳐 참으로 다양하고 많다. 여성국악동호회를 만들어 활동했고 그들이 힘을 합쳐 국악예술학교를 만들고 이사장을 한 일이라든지 말년에 국악협회 이사장을 한 일 등도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가 남긴 가장 큰 업적은 판소리의 격을 높이고 판소리를 국내·외에 선양한 일이라 하겠다. 해방공간에서는 건국의 핵심인사들과 미군정청 관계자들이 회식이라도 하게 되면 김소희·박귀희 등이 그런 자리에 나아가 판소리와 가야금병창을 들려주곤 했는데 그것이 한국의 문화를 알리는 중요한 일을 하는 것이었다. 또 1962년에는 한국민속예술단의 일원으로 파리를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를 순회 공연했고 1964년에는 삼천리가무단의 일원으로 미국 여러 도시를 순회 공연했다. 1972년 봄 뉴욕 카네기홀에서는 판소리 연주도중 청중들이 기립박수를 할 정도로 크게 감동을 주기도 했는데 서울에 돌아 온 다음 나에게 “저들은 한국말을 모르면서도 판소리에 그처럼 감동을 받는데 한국 사람들은 왜 그런 음악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지 모르겠어요.”라고 했었다. 김소희는 명창으로서의 프라이드도 대단했다. 그는 13세에 판소리를 시작한 것으로 잡고 있기 때문에 63세되던 1979년이 국악생활 50주년이 되는 해였다. 한국 최초로 김소희는 국악생활 50주년 기념공연을 세종문화회관 소강당에서 최종민의 사회로 뜻 있게 잘 마쳤다. 그런데 그 후 김소희명창은 큰 무대에 서지 않으려 했다. 내가 왜 그러느냐고 말하면 “나는 명창으로서의 자존심이 있습니다. 내 소리가 나의 마음을 따라 주지 않아 제대로 고음이 나지 않는데 나의 청중들에게 실망스러운 내 모습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무대에 서지 않으려는 것이니 그리 아세요.”하는 것이었다. 참으로 깨끗하고 고고한 김소희명창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제자 복이 없다고 한탄 한 적이 있다. 제자들 중 오정숙은 김연수에게 가고 성창순은 정응민에게 가고 안향련·김동애·박소영은 고인이 되었다. 신영희·안숙선·박윤초·유수정·이명희·한정하·이영태·오정해·김미숙 등이 판소리의 길을 가고 있을 뿐이다. 국립창극단 출신의 명창을 꼽으라면 박동진을 빼 놓을 수 없다. 박동진은 1975부터 1979까지 제2대 국립창극단단장을 한 명창이다. 박동진도 어린 시절은 판소리를 공부했지만 먹고 살 방도가 없어 지방의 소리선생이나 여성국극단의 반주악사(장구)등을 하면서 살았지만 1962년부터 1972년까지 국립국악원 악사로 있으면서 정력적인 판소리독공을 계속하여 최초로 대중을 상대로 한 흥보가 완창공연을 통해 판소리 중흥에 불을 지핀 인물이다. ‘68년에 흥보가를 5시간에 걸쳐 완창하고 ’69년에는 춘향가를 8시간 동안 완창으로 명동국립극장에서 공연했다. 이 후 박동진은 언론이 주목하는 판소리의 대명사처럼 되었고 계속된 ‘70년 심청가(6시간),’71년의 수궁가(5시간), 적벽가(6시간)완창으로 그는 ‘73년에 판소리의 인간문화재가 되었다. ’70년에는 성서판소리 ‘예수전’과 ‘팔려간 요셉’등을 발표하여 한국기독교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도 했다. 이 후 ‘성웅 이순신’ 같은 장편의 서사시는 직접 사설을 짓고 작창 하여 녹음하는 등 판소리 역사에 빛나는 업적을 많이 남겼다. 판소리를 들으러 오는 청중이면 어떤 청중들이라도 쉽고 재미있게 판소리를 감상할 수 있도록 현장에 맞는 소리를 척척 만들어 불러주는 창조능력을 가진 명창이었다. 청중을 울리고 웃기는 능력을 충분이 가지고 있었던 명창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무대에서 즉흥적으로 가사를 만들고 내용을 꾸려서 멋지게 전달하는 실력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최고의 명창이었다. 박동진에 버금가는 여류명창으로는 오정숙(1935~2008)을 꼽을 수 있다. 박동진이 완창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자 오정숙도 판소리 완창에 도전하게 된다. ‘72년에 춘향가, 73년에 흥보가, 74년에 수궁가, 75년에 심청가를 완창했는데 여류명창이 이처럼 여러 바탕의 판소리를 완창으로 발표한 것은 오정숙이 최초이다. 박동진이 본인의 판소리를 발표했다면 오정숙은 그의 스승 김연수의 작품을 발표한 것이 다를 뿐이다. 이 판소리들은 오늘날 김연수의 호를 따서 동초제 판소리라 부르고 지금 전주를 중심으로 오정숙의 제자들이 잘 전수하고 있다. 오정숙은 1977년부터 90년대 말까지 20여년 국립창극단에 있으면서 많은 배역을 멋지게 해 내었지만 특히 춘향가의 월매 역은 따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명연기를 보여주는 명배우였다. 소리와 연기가 모두 완벽에 가까울 정도 야무지게 활동했던 명창·명배우였던 분이 바로 오정숙이라 할 수 있다. 조상현도 국립창극단 출신의 명창으로 빼 놓을 수 없는 사람이다. 1939년생인 그는 1971부터 1982까지 국립창극단에 있었고 늘 주연을 하며 창극의 대중화에 기여했었다. ‘70년대 말에는 MBC. TV에 창극 프로그램을 만들어 계속 출연하면서 시청자들의 인기를 얻기도 했었다. 무엇보다 그는 한국 최고의 명창이다. 정응민에게 배운 판소리 춘향가·심청가·수궁가를 주로 부르고 박녹주에게 배운 흥보가를 부를 수 있긴 하지만 정응민이 흥보가를 부르지 않아서인지 조상현도 흥보가를 자주 부르지는 않는다. 그의 장기는 춘향가·심청가·수궁가라 할 수 있다. 그는 어떤 청중이라도 “야 - ! 판소리가 참으로 멋있구나.” 할 정도로 감동을 줄 수 있는 명창이다. 발성이 완벽에 가깝고 세세상청을 통성으로 낼 수 있는 유일한 명창이다. 배운 판소리의 작품성이 높기 때문에 본인이 손 댈 필요가 없기도 하지만 본인의 생각(미학)이 멋대로 뜯어고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배운 그대로 부르는데 완성도가 높은 판소리를 부른다. 그는 광주광역시 국극단을 만들어 오래 단장으로 있었고 사단법인 판소리보존회 회장으로 역시 오래 활동했다. 다른 명창들처럼 판소리를 개인지도형식으로 한 사람씩 가르치는 교수보다는 다수를 모아놓고 그룹지도처럼 가르치는 강의 식 판소리 교습으로 유명한데 그렇게 가르친 제자들이 수 백 명에 이른다. 조상현은 판소리명창으로 최고의 명창이지만 창극의 배우로서도 최고의 배우라 할 수 있다. 춘향전의 이도령역이나 심청가의 심봉사역을 특히 잘 하고 무슨 역이든지 척척해내는 명배우이다. 내가 국립창극단 출신의 명창들을 몇 사람 소개하는 것은 지금의 후학들이 이런 선배들의 여러 가지 특징 중에 무엇이라도 참고하여 각자의 미래를 더 훌륭하게 설계하고 더 열심히 공력을 쌓았으면 하는 소망이 있어 소개하는 것이다. 지면관계로 너무 간략하게 다룬 것을 죄송하게 생각한다. 故 최종민교수 (철학박사, 국립극장예술진흥회 회장, 동국대문화예술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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